1887년, 영국의 위스키 작가 알프레드 바너드(Alfred Barnard)는 영국 제도의 모든 위스키 증류소를 직접 방문해 기록으로 남겼다. 그의 책 The Whisky Distilleries of the United Kingdom은 당대의 사진과 삽화를 담은 일종의 현장 보고서였다.
바너드가 더블린에 도착했을 때 그가 목격한 것은 압도적이었다. 토머스 스트리트(Thomas Street)의 조지 로(George Roe) 증류소는 단일 증류소로는 영국 제도 전체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바우 스트리트(Bow Street)의 제임슨(Jameson) 증류소, 존스 레인(John's Lane)의 파워스(Powers) 증류소, 그리고 북아일랜드 콤버(Comber)의 증류소까지 — 더블린은 당시 세계 위스키 산업의 중심이었다.
그로부터 80년 후, 이 증류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아일랜드 전체에 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는 두 곳밖에 남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전성기의 더블린
19세기 중반 아이리시 위스키는 영어권 세계의 고급 증류주였다. 런던의 상류층 클럽, 뉴욕의 바, 빅토리아 시대 영국 제국의 식민지에서 "위스키"라고 하면 아이리시를 뜻하는 경우가 많았다.
숫자가 이를 뒷받침한다. 1870년대 아일랜드의 위스키 생산량은 연간 1,200만 갤런을 넘었다. 더블린의 4대 증류소 — 제임슨, 파워스, 로, 그리고 존 제임슨(John Jameson & Son) — 는 각각 수천 명을 고용하고 수도 더블린 경제의 핵심 축을 이루었다.
아이리시 위스키의 강점은 포트 스틸(Pot Still) 방식의 단식 증류와 발아하지 않은 생보리(unmalted barley)의 혼합에 있었다. 이 조합이 특유의 무겁고 기름진 질감과 복잡한 풍미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위스키 평론가들은 아이리시를 스카치보다 상위 카테고리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첫 번째 균열 — 코피 스틸 거부 (1831)
아이리시 위스키 쇠퇴의 씨앗은 한 아이리시인이 발명한 기계에서 시작됐다.
에니어스 코피(Aeneas Coffey)는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의 세관원이었다. 그는 위스키 증류소를 단속하는 직무를 맡으면서 증류 과정에 깊이 관여하게 됐고, 1831년 특허를 낸 연속식 증류기(Continuous Still, 코피 스틸)를 발명했다.
코피 스틸의 핵심은 효율성이었다. 전통적인 단식 증류기(Pot Still)는 한 번 증류할 때마다 가동을 멈추고 다시 채워야 했다. 코피 스틸은 연속적으로 작동했다. 같은 양의 원료로 훨씬 더 많은 증류주를 생산할 수 있었고, 생산 비용이 극적으로 낮아졌다.
코피는 이 발명품을 먼저 아일랜드 증류업자들에게 제안했다. 그들은 거부했다.
거부의 이유는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당시 아일랜드 증류업자들의 논리는 이랬다. "코피 스틸로 만든 증류주는 가볍고 특색이 없다. 그것은 위스키가 아니다." 더블린의 대형 증류소들은 1879년 공동 성명에서 코피 스틸로 생산한 제품을 "진짜 위스키"로 볼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논리는 맞았다. 그러나 시장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증류업자들은 코피 스틸을 열렬히 채택했다. 코피 스틸로 생산한 가벼운 그레인 위스키(Grain Whisky)와 기존의 몰트 위스키를 섞은 블렌디드 스카치(Blended Scotch)가 등장했다. 저렴하고, 가볍고, 마시기 쉬웠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대중 시장은 이 블렌디드 스카치를 선택했다.
아이리시 증류업자들이 "진짜 위스키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것 — 가볍고 마시기 쉬운 특성 — 이 오히려 블렌디드 스카치의 성공 비결이 됐다.
1880년대부터 스카치 블렌디드의 시장 점유율은 빠르게 올라갔다. 제임슨, 파워스, 로가 최고급 포트 스틸 위스키를 고가에 판매하는 동안, 스카치 블렌디드는 훨씬 낮은 가격으로 대중 시장을 장악했다.
세 가지 재앙이 동시에
코피 스틸 거부가 아이리시 위스키의 경쟁력을 서서히 약화시켰다면, 20세기 초에는 세 가지 타격이 동시에 덮쳤다. 어느 하나만으로도 심각했을 충격이 동시에 일어났다.
첫 번째 타격 — 아일랜드 독립과 영국의 경제 보복 (1919–1922)
1919년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은 아일랜드 상품에 대한 무역 제재를 가했다. 아일랜드 증류소들은 영국 시장으로의 수출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1922년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이 성립됐다. 독립이 이루어졌지만 경제적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 제국 시장 — 당시 아이리시 위스키의 가장 큰 수출처 — 에 대한 접근이 사실상 차단됐다. 독립 이전에는 제국 내 자유무역으로 유통되던 아이리시 위스키가 이제는 외국 수입품이 됐다.
두 번째 타격 — 미국 금주법 (1920–1933)
1920년 미국에서 금주법(Prohibition)이 발효됐다. 아이리시 위스키의 두 번째 핵심 수출 시장이 사라졌다.
금주법의 충격은 단순한 수출 중단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미쳤다. 금주법이 시행되는 13년 동안, 미국의 지하 주류 시장에는 "아이리시 위스키"라는 이름을 붙인 질 낮은 밀주가 범람했다. 정식 아이리시 위스키를 구할 수 없게 된 소비자들이 이 가짜 제품들에 익숙해졌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됐을 때, 미국 소비자들은 두 가지 이유로 아이리시 위스키를 외면했다. 13년 동안 단절이 있었던 것, 그리고 "아이리시 위스키"라는 이름 자체가 저급 밀주와 연결되는 이미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스카치는 달랐다. 캐나다를 통한 스카치의 밀수입은 금주법 기간에도 지속됐고, 미국 소비자들은 스카치와의 접점을 유지했다.
세 번째 타격 — 영아 무역 전쟁 (1932–1938)
1932년 에아몬 드 발레라(Éamon de Valera)가 아일랜드 총리가 됐다. 그는 아일랜드 자유국이 영국에 지불하던 토지 연금(Land Annuities) 납부를 중단했다. 영국은 즉각 아일랜드 상품에 20% 관세를 부과했다. 아일랜드도 영국 상품에 보복 관세를 매겼다.
이른바 '경제 전쟁(Economic War)'이 6년간 지속됐다.
아이리시 위스키에게 이것은 치명적이었다. 영국은 이미 최대 수출 시장을 잃은 상황에서, 경제 전쟁은 남아 있던 영국 시장마저 봉쇄했다. 더불어 영국 식민지 —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 — 에서도 아이리시 위스키는 사실상 영국산 스카치에 비해 심각한 가격 불이익을 안고 경쟁해야 했다.

숫자로 보는 붕괴
세 가지 타격의 누적 효과는 수치로 확인된다.
| 연도 | 아일랜드 증류소 수 | 비고 |
|---|---|---|
| 1887 | 약 30개 | 알프레드 바너드 기록 기준 |
| 1900 | 약 28개 | 전성기 말기 |
| 1920 | 약 20개 | 독립전쟁 여파 시작 |
| 1930 | 약 10개 | 금주법·무역 차단 여파 |
| 1950 | 6개 | 2차 대전 추가 타격 |
| 1966 | 3개 회사 | IDL 통합 전 |
| 1972 | 2개 | 미들턴, 부시밀스 |
2차 세계대전도 겹쳤다. 전쟁 중 아일랜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곡물 배급제가 시행됐고, 위스키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보리의 양이 급감했다. 숙성 재고를 쌓아야 하는 위스키 산업에서 생산 중단은 10년 이상 지속되는 공급 부족을 의미했다.
한때 세계 최대였던 조지 로의 토머스 스트리트 증류소는 1923년 문을 닫았다. 제임슨의 경쟁사였던 존 제임슨은 1920년대에 폐업했다. 파워스도 쇠퇴를 거듭했다.
IDL — 살아남기 위한 통합
1966년, 마지막으로 남은 세 회사 — 제임슨(John Jameson & Son), 파워스(John Power & Son), 코크 증류업자 회사(Cork Distilleries Company) — 는 아이리시 디스틸러스 리미티드(Irish Distillers Limited, IDL)로 합병했다.
이것은 전략적 선택이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합병이었다. 세 회사 모두 따로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IDL은 모든 생산을 코크 카운티의 미들턴(Midleton) 증류소 한 곳에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더블린의 제임슨 바우 스트리트 증류소와 파워스의 존스 레인 증류소는 1970년대 말에 완전히 가동을 멈췄다.
1970년대 아일랜드에서 위스키를 생산하는 증류소는 두 곳뿐이었다. 미들턴과 북아일랜드의 부시밀스(Bushmills).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산업이 사실상 두 곳으로 수렴됐다.
왜 스카치는 살아남았는가
같은 시기 스코틀랜드 위스키는 어떠했는가. 스코틀랜드도 금주법과 무역 분쟁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리시처럼 치명적이지 않았다. 차이는 여러 층위에 있었다.
시장 분산. 스카치는 영국 제국 외에도 유럽 대륙 시장에서 입지를 구축해 있었다. 아이리시는 영국 제국과 미국에 수출이 집중되어 있었다.
코피 스틸의 채택. 블렌디드 스카치의 저렴한 가격은 경제 불황기에도 소비자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단식 증류 위주의 아이리시는 가격 경쟁력이 없었다.
스카치의 정치적 중립.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일부로 남았다. 스카치는 영국 제국 시장에서 관세 없이 유통됐다. 아이리시는 독립과 함께 이 이점을 잃었다.
밀수 네트워크. 미국 금주법 기간에 캐나다를 통한 스카치 밀수 경로가 유지됐다. 스카치는 금주법 시대에도 미국 소비자와의 접점을 끊지 않았다.
르네상스 — 그리고 지금
1988년 페르노 리카르(Pernod Ricard)가 IDL을 인수했다. 이것이 제임슨 부활의 전환점이 됐다. 페르노 리카르는 제임슨을 글로벌 브랜드로 육성하는 데 집중 투자했다.
성장은 느렸다. 1990년대에는 여전히 스카치의 거대한 그늘 아래 있었다. 전환이 일어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아이리시 위스키의 부드럽고 마시기 쉬운 특성이 칵테일 문화와 맞물리면서 미국 시장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숫자가 극적이다. 2000년 제임슨의 연간 판매량은 약 50만 케이스였다. 2020년에는 800만 케이스를 넘어섰다.
새 증류소들도 생겨났다. 틸링(Teeling, 2015년 더블린 개소), 튜리(Tullamore D.E.W.), 딩글(Dingle), 워터포드(Waterford) — 2010년대 이후 아일랜드 전역에 증류소가 다시 들어서기 시작했다. 2020년대 기준 아일랜드의 증류소 수는 40개를 넘어 전성기인 19세기 말의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역사가 남긴 질문
아이리시 위스키의 쇠퇴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다. 코피 스틸을 거부한 것은 품질에 대한 원칙이었고, 그 원칙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리시 포트 스틸 위스키가 블렌디드 스카치보다 복잡하고 공들인 술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장은 원칙보다 현실을 따른다. 가볍고 저렴한 술이 대중에게 더 빠르게 퍼진다. 독립 이후의 정치적 현실, 금주법이라는 외부 충격, 경제 전쟁이라는 불운 — 이 모든 것이 겹치면서 아이리시 위스키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할 시간을 잃었다.
지금의 아이리시 위스키 르네상스는 이 역사를 알고 있다. 새로운 증류소들은 전통 포트 스틸 방식을 복원하면서도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하고 있다. 한 번 잃었다가 되찾는 것은 처음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다.
더블린 바우 스트리트의 제임슨 증류소 건물은 지금 박물관이 됐다. 1987년까지 이 건물에서 위스키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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