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위스키를 떠올릴 때 따라오는 잔은 대개 두껍고 묵직한 락 텀블러다. 버번을 얼음 위에 붓는, 향보다 편안함을 위한 그릇. 그런데 미국에는 일 년에 한 번, 가장 유명한 위스키 음료가 전혀 다른 그릇에 담겨 나오는 순간이 있다. 유리가 아니라 (銀)으로 만든 잔이다.

켄터키 더비의 민트 줄렙 컵(mint julep cup)이다.

미국 위스키의 '공식 잔'은 유리가 아니다

세계의 위스키 문화는 대부분 유리로 수렴한다. 스코틀랜드는 글렌케언, 전문가는 코피타, 일상은 락 텀블러 — 모두 투명한 유리다. 위스키를 마시는 일이 곧 위스키를 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호박빛을 눈으로 좇고, 잔을 돌려 다리(legs)를 보고, 향을 코로 모은다.

그런데 미국 남부에는 정반대 발상의 잔이 있다.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금속으로 만든 잔. 민트 줄렙 — 버번에 설탕과 민트, 잘게 부순 얼음을 더한 미국 남부의 여름 술 — 의 정통 그릇은 유리컵이 아니라 은이나 주석(pewter)으로 만든 줄렙 컵이다. 위스키를 보여주기를 포기한 대신, 이 잔은 전혀 다른 감각을 전한다.

왜 금속인가 — 서리가 잔의 일부다

답은 열전도에 있다. 은과 주석은 유리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열을 전달한다. 잘게 부순 얼음을 가득 채운 금속 잔은 그 차가움을 바깥 표면까지 순식간에 끌어내고, 공기 중의 수분이 응결해 잔 겉면에 하얀 서리(frost)가 맺힌다.

이 서리가 핵심이다. 민트 줄렙은 '차갑게 마시는 술'이 아니라 '차가움 자체를 즐기는 술'에 가깝다. 손에 닿는 잔의 냉기, 표면에 핀 서리, 그 위로 올라오는 민트 향 — 잔이 만들어내는 이 감각 전체가 한 잔의 경험이다. 유리는 이 서리를 이만큼 선명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줄렙의 잔은 안을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차가움을 전하는 전도체로 선택됐다.

구슬 장식 테두리가 있는 은 민트 줄렙 컵

은이나 주석으로 만든 줄렙 컵. 금속의 빠른 열전도가 잘게 부순 얼음의 냉기를 바깥까지 끌어내, 잔 표면에 서리가 맺힌다 (사진: Jud McCranie, CC BY-SA 4.0)

잔을 쥐는 법 — 서리를 지키는 예법

줄렙 컵에는 잔을 쥐는 법까지 따라붙는다. 잔의 위쪽 테두리와 아래쪽 바닥만 손가락으로 잡고, 몸통은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다시 서리에 있다. 손바닥으로 잔의 몸통을 감싸 쥐면 체온이 금속으로 전해져 애써 맺힌 서리가 녹아버린다. 테두리와 바닥만 잡으면 서리를 흩뜨리지 않고, 잔도 차갑게 유지된다. 여기에는 또 다른 결도 있었다 — 손님에게 은잔에 술을 대접하는 것 자체가 부와 격식의 상징이었고, 그 은잔을 '올바르게' 쥘 줄 아는 것 또한 남부 상류 사회의 매너로 통했다(Wikipedia). 잔을 쥐는 사소한 손동작 하나에 실용(서리 보존)과 과시(은의 예법)가 함께 담긴 셈이다.

켄터키 더비의 술

서리가 맺힌 은잔에 민트를 꽂아 담은 민트 줄렙

서리가 핀 은잔에 잘게 부순 얼음과 민트를 수북이 올린 민트 줄렙. 1938년 이래 켄터키 더비의 공식 음료다 (사진: Cocktailmarler, CC BY-SA 3.0)

민트 줄렙을 미국 전체의 상징으로 끌어올린 것은 켄터키 더비다. 1875년 시작된 이 경마 대회는 1938년부터 민트 줄렙을 공식 음료로 내세웠고(Wikipedia), 이후 줄렙은 더비의 상징이 됐다. 더비 주말, 켄터키 오크스와 더비 이틀 동안 처칠 다운스 경마장에서 소비되는 줄렙은 약 12만 잔에 이른다(Wikipedia, 2009년 기준).

오늘날 경기장에서 대량으로 나가는 줄렙은 그해의 그림이 새겨진 기념 글라스에 담기지만, 줄렙 본래의 격식 있는 그릇은 어디까지나 은·주석 컵이다. 남부 가정에서 은 줄렙 컵은 결혼이나 기념일에 주고받고, 이름을 새겨 대를 물리는 가보(家寶)이자, 작은 트로피처럼 여겨졌다.

'줄렙'이라는 이름 — 장미수에서 온 단어

그런데 '줄렙(julep)'이라는 말 자체는 어디서 왔을까. 어원을 거슬러 오르면 뜻밖에도 위스키와는 먼 곳에 닿는다. 출발점은 페르시아어 굴랍(gulāb) — '장미'를 뜻하는 gul과 '물'을 뜻하는 āb을 합친 '장미수'다. 이 말이 아랍어 줄랍(julāb)을 거쳐 중세 라틴어와 유럽 언어로 건너오면서, 향과 단맛을 입힌 음료, 특히 약을 먹기 좋게 달게 만든 '물약'을 가리키는 말로 굳었다.

그러니 '줄렙'은 본래 특정 술 이름이 아니라 '달콤한 약용 음료'를 뜻하는 일반명사였다. 여기에 박하를 더한 것이 민트 줄렙 — 글자 그대로 풀면 '박하를 넣은 단 음료'인 셈이다. 장미수에서 출발한 이름이, 긴 여정 끝에 미국 남부의 버번 칵테일에 와서 멈춘 것이다.

헨리 클레이와 버번 줄렙

민트 줄렙 자체는 더비보다 훨씬 오래됐다. 18세기 미국 남부에서 이미 마시던 술이었고, 처음에는 버번이 아니라 브랜디나 럼을 베이스로 썼다. 버지니아의 줄렙이 그랬다.

여기에 버번을 앉힌 인물로 흔히 헨리 클레이(Henry Clay)가 거론된다. 19세기 초 켄터키 출신 상원의원이던 그는 워싱턴 D.C.의 윌러드 호텔 라운드 로빈 바에 이 술을 가져갔고, 켄터키의 술인 버번을 줄렙의 베이스로 알린 것으로 전해진다(Wikipedia). 켄터키가 버번의 고장이고, 더비가 켄터키의 잔치이니, 버번 줄렙이 더비의 술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보는 잔이 아니라 느끼는 잔

세계의 위스키잔은 대체로 '본다'는 행위를 위해 설계됐다. 글렌케언은 향을 모으려 입구를 좁혔고, 코피타는 색을 보려 다리를 세웠으며, 락 텀블러조차 얼음 위 호박빛을 들여다보게 한다. 모두 투명한 유리인 데는 이유가 있다.

민트 줄렙 컵은 그 전제를 뒤집는다. 안이 보이지 않아도 좋다. 이 잔이 전하려는 것은 시각이 아니라 촉각 — 손끝의 냉기와 표면의 서리이기 때문이다. 미국 위스키가 가진 가장 상징적인 '공식 잔'이 유리가 아니라 금속이라는 사실은, 한 잔의 경험이 꼭 눈으로만 완성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어떤 술은 향을 보여주는 창이 아니라, 차가움을 전하는 그릇을 원한다. 일 년에 한 번, 더비의 봄날에 미국이 꺼내 드는 은잔이 바로 그런 잔이다.

참고 자료

민트 줄렙의 역사·켄터키 더비·헨리 클레이·은잔 예법 — Wikipedia, "Mint julep" 및 일반에 널리 알려진 사실 정리.

이미지 출처

커버·은잔 줄렙 — Cocktailmarler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 은 줄렙 컵 — Jud McCranie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조회 좋아요
Comments

댓글

첫 번째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