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구를 만들던 공장이 술잔을 만들게 됐다는 이야기는 대개 브랜드가 지어낸 사연처럼 들린다. 도쿄의 쇼토쿠글라스(松徳硝子)는 그게 그냥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잔의 두께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스하리(うすはり)는 두께 0.9mm짜리 유리잔이다. 손톱보다 얇다. 위스키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 잔이 화제가 되는 이유는 향을 모아주는 구조나 굴절률 같은 게 아니라, 입술에 닿았을 때 아무것도 닿지 않은 것 같다는 감각 하나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본 우스하리 잔의 얇은 테두리
위에서 내려다본 우스하리. 테두리가 유리 두께라기보다 그어 놓은 선 하나로 보인다 (사진: uemu, CC BY 2.0)

전구 공장에서 시작했다

1922년, 무라마쓰 쇼타로가 도쿄에 마루사 밸브 제조소를 세웠다. 만들던 물건은 전구용 유리다. 백열전구의 유리 부분은 얇고, 두께가 고르고, 기포가 없어야 한다. 두꺼우면 열을 못 견디고, 한쪽이 두꺼우면 그 자리부터 깨진다. 이걸 사람이 입으로 불어서 맞췄다.

회사는 1928년 스미다구로 옮겼고, 1942년에는 마쓰시타전기와 손잡고 전기초자 회사로 재편됐다가 1945년 도쿄와 오사카 공장을 모두 잃었다. 전후에 무라마쓰硝子로 다시 서고, 창업자가 세상을 떠난 1958년에 지금의 사명인 쇼토쿠글라스가 됐다. 그 사이 전구는 기계가 만드는 물건이 됐다. 사람이 얇게 부는 기술은 갈 곳이 없어졌다.

그 기술을 식기 쪽으로 돌려 1989년에 내놓은 것이 우스하리다. 등록상표이고, 지금도 장인이 형틀에 불어서 만든다. 회사는 2020년 아라카와구 미나미센주로 옮겼지만 만드는 방식은 그대로다.

쇼토쿠글라스 공방에서 장인이 입으로 유리를 불고 있다
쇼토쿠글라스 공방. 전구를 불던 방식 그대로, 지금도 사람이 입으로 불어서 잔을 만든다 (사진: Banzai Hiroaki, CC BY 2.0)

0.9mm가 실제로 바꾸는 것

얇은 잔이 맛을 좋게 만든다는 주장은 절반만 맞다. 유리는 아무 맛도 내지 않는다. 다만 잔 테두리 두께가 미각에 개입하는 방식은 실제로 있다. 두꺼운 림은 입술을 먼저 자극하고, 술이 혀에 닿는 각도와 속도를 바꾼다. 0.9mm에서는 그 개입이 거의 사라진다.

핵심은 가볍다는 게 아니라 경계가 흐려진다는 쪽이다. 잔을 기울일 때 유리 테두리를 넘어오는 단계가 느껴지지 않고 술이 곧장 들어온다. 일본의 갓포와 바에서 이 잔을 오래 써 온 이유도 그 음용감 때문이다.

재질은 바륨 크리스털이다. 납 대신 바륨으로 투명도와 광택을 확보한 무연 크리스털이라, 납 함량이 높은 유럽식 크리스털처럼 장기 보관 시 용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대신 납 크리스털 특유의 묵직한 굴절과 '쨍'하는 타격음은 없다. 우스하리를 들면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다.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걸 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회전하는 축에 물린 유리를 나무 도구로 성형하는 공정
불어낸 유리를 회전시키며 나무 도구로 형태를 잡는다. 두께가 어긋나면 그 자리부터 깨진다 (사진: imgdive, CC BY 2.0)

위스키라면 오올드 라인

우스하리에서 위스키용으로 보는 건 오올드(オールド) 시리즈다. 세 가지 크기가 있다.

오올드 S — 지름 65mm × 높이 75mm, 만수 용량 약 180ml

니트로 마실 때 쓰기 좋은 크기다. 30ml를 따르면 바닥에 얕게 깔리고, 잔이 작아 향이 위로 모인다. 얼음은 각얼음 한두 개가 한계다. 일본 정가로 2천 엔 안팎.

오올드 M — 지름 77mm × 높이 90mm, 만수 용량 약 300ml

가장 무난하다. 니트도 되고 큰 얼음 하나를 넣어 온더락도 된다. 희망소비자가격이 2,200엔 선이라 우스하리 입문으로 이걸 먼저 사는 경우가 많다. 하나만 살 거면 이쪽.

오올드 L — 지름 87mm × 높이 100mm, 만수 용량 약 400ml

구형 얼음을 넣고 온더락으로 마시기 위한 크기다. 다만 이 조합은 추천하기 조심스럽다. 이유는 아래에.

하이볼이라면 텀블러 쪽

일본에서 우스하리가 정말 많이 팔리는 건 맥주잔·하이볼잔으로서다. 텀블러 라인이 다섯 단계로 나뉜다.

  • SS — 약 85ml. 식전주, 니트 한 모금용
  • S — 약 150ml. 냉주용
  • M — 약 260ml. 위스키 하이볼을 한 잔씩 만들어 마시기에 적당
  • L — 약 375ml. 하이볼 표준. 얼음 넣고 탄산수까지 여유 있다
  • LL — 약 510ml. 맥주 쪽
크기별로 늘어놓은 얇은 유리잔들
촬영자가 '우스하리 + α'라고 적어 둔 사진. 우스하리와 다른 얇은 잔들이 섞여 있는데, 크기 단계가 얼마나 촘촘한지는 그대로 보인다 (사진: uemu, CC BY 2.0)

탄산 음료에서 얇은 유리는 이점이 뚜렷하다. 입술 저항이 없으니 탄산이 입안에서 터지는 감각이 그대로 온다. 하이볼 잔을 고르는 다른 기준들과 비교하면 우스하리는 보온성을 버리고 음용감을 택한 극단이다. 대신 손 온도가 빠르게 전달되니 잔을 감싸 쥐지 말고 아래쪽을 잡는 편이 낫다.

사기 전에 알아야 할 것

식기세척기에 넣을 수 없다. 제조사가 명시적으로 불가라고 한다. 손세척만 가능하고, 씻다가 깨지는 사고가 가장 흔하다. 스펀지를 잔 안에 밀어 넣고 힘을 주는 순간 옆면이 나간다. 잔 관리 요령을 그대로 지키면 되지만, 매일 쓰는 잔으로는 확실히 손이 간다.

얼음과 상성이 나쁘다. 얇은 유리는 국부적인 충격에 약하다. 얼음을 툭 떨어뜨리는 습관이 있으면 오래 못 쓴다. 온더락으로 쓰려면 잔을 기울여 얼음을 미끄러뜨려 넣어야 하고, 잔 벽이 얇아 잔 자체를 미리 차갑게 해도 냉기를 붙잡아 두지 못한다. 얼음이 빨리 녹는다는 뜻이다. 용도를 나눠 쓰는 편이 낫다. 우스하리는 니트와 하이볼에, 얼음을 오래 붙잡고 마시는 온더락에는 두꺼운 잔에 맡기는 식이다.

노징 잔이 아니다. 오올드는 위아래 지름이 거의 같은 원통형이다. 향을 모으는 구조가 아예 없다. 코를 박고 향을 분석하려면 글렌케언이나 코피타 계열이 훨씬 낫다. 우스하리는 향을 읽는 잔이 아니라 마시는 감각을 위한 잔이다. 이 둘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면 실망한다.

어디서, 얼마에

일본 정가는 오올드 M 기준 2,200엔 정도다. 잔 하나 값으로는 비싸지 않다. 문제는 국내로 넘어올 때다. 정식 수입 제품과 병행 수입이 섞여 있고, 파손 위험 때문에 포장·배송 비용이 붙어 일본 가격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직구를 한다면 낱개보다 오동나무 상자(기리바코) 2개 세트를 권한다. 우스하리는 원래 목상자 포장 라인이 잘 갖춰져 있어서 파손 확률이 눈에 띄게 낮고, 선물용으로도 그대로 쓸 수 있다. 일본 크리스털 3사의 카가미 에도 키리코가 문양으로 값을 만든다면, 우스하리는 정반대로 아무 장식도 없이 두께 하나로 값을 만든다. 같은 나라 유리인데 방향이 정확히 반대다.

깨질 걸 각오하고 사는 잔이다. 매일 험하게 쓰는 잔을 찾는다면 이 글은 도움이 안 된다. 다만 위스키를 한 잔 따라 놓고 천천히 마시는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면, 2천 엔대에 이만큼 다른 경험을 주는 잔은 흔치 않다. 얇은 게 좋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한 번은 알아야 다른 잔들의 두께도 비로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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