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파리의 카페, 오후 다섯 시. 웨이터가 초록빛 술이 조금 담긴 잔 하나에 각설탕, 구멍이 뚫린 납작한 숟가락, 그리고 얼음물을 채운 물병을 함께 내온다. 손님은 숟가락을 잔 위에 가로로 걸치고 그 위에 각설탕을 얹은 다음, 찬물을 아주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뜨린다. 물이 설탕을 적셔 잔으로 흘러내리면, 맑던 초록 술이 위에서부터 부옇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투명하던 액체가 우윳빛 도는 연둣빛으로 바뀌는 그 순간을 프랑스 사람들은 **루슈(louche)**라 불렀다.
압생트는 좀 별난 술이다. 술 자체보다 그 술을 마시는 도구와 절차가 더 유명하다. 눈금이 새겨진 전용 잔, 구멍 뚫린 은숟가락, 여러 갈래로 물을 흘리는 분수 — 술 한 잔을 만드는 데 이렇게 많은 소도구가 따라붙는 술은 드물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생트는 물을 부어 흐리기 전에는 완성되지 않는다.
흐려야 비로소 한 잔이 된다
정석은 프랑스식이라 부르는 방법이다. 먼저 잔에 압생트를 한 모금 분량, 대략 30밀리리터쯤 따른다. 그 위에 납작하고 구멍이 숭숭 뚫린 숟가락을 걸치고 각설탕 하나를 올린다. 그리고 얼음처럼 찬물을 설탕 위로 아주 천천히 떨어뜨린다. 급하면 안 된다. 물이 설탕을 녹이며 한 방울씩 잔으로 떨어지고, 물 대 술의 비율이 대략 서너 배에서 다섯 배에 이를 때까지 이어간다.
물줄기가 술에 닿는 자리마다 초록이 우유처럼 풀어진다. 압생트에는 아니스와 회향에서 나온 정유(精油)가 녹아 있는데, 이것들은 알코올에는 잘 녹지만 물에는 잘 녹지 않는다. 그래서 물이 들어와 알코올 도수가 떨어지면 녹아 있던 기름 성분이 아주 작은 방울로 다시 떠오르며 빛을 산란시킨다. 맑던 술이 뿌옇게 흐려지는 게 그래서다. 루슈는 프랑스어로 '흐리다, 수상쩍다'는 뜻인데, 술이 흐려지는 이 현상에 그대로 이름이 붙었다.
각설탕은 단맛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압생트는 향쑥의 쓴맛이 강한 술이라 설탕이 그 각을 눅여 준다. 취향에 따라 설탕을 빼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천천히 흐리는 데 있다. 급하게 물을 콸콸 부으면 향이 뭉개지고 루슈도 곱게 오르지 않는다. 이 술은 마시는 사람에게 잠깐의 인내를 요구한다.

잔에 새겨진 한 모금
압생트 잔을 보면 아래쪽이 도톰하게 부풀어 있거나 가는 목 아래 작은 방(reservoir)이 달려 있다. 장식이 아니다. 그 부푼 자리가 곧 압생트 한 모금의 양을 재는 눈금이다. 카페에서 술을 팔 때 잔마다 담기는 양이 들쭉날쭉하면 곤란하니, 아예 잔 자체에 정량 선을 만들어 둔 것이다. 손님도 웨이터도 그 선까지만 채우면 됐다.
이런 잔 가운데 가장 이름난 것이 퐁타를리에(Pontarlier) 잔이다. 퐁타를리에는 스위스 국경에 가까운 프랑스의 작은 도시로, 19세기에 압생트 증류소가 몰려 있던 이 술의 본고장이었다. 그 도시 이름이 잔의 대명사가 됐다. 바닥에 저수통이 달린 잔에 술을 그 선까지 채우고 물을 흘려 넣으면, 술과 물이 좁은 목을 통해 천천히 섞이면서 루슈가 더 극적으로 피어오른다. 잔의 생김새 자체가 이 술을 위해 다듬어진 셈이다.

구멍 뚫린 숟가락
압생트 숟가락은 국을 뜨는 숟가락이 아니다. 납작하고 넓적한 판에 구멍이나 홈이 뚫려 있어, 잔 위에 걸쳐 놓고 각설탕을 받치는 받침대 노릇을 한다. 물이 그 구멍으로 설탕을 녹이며 아래 잔으로 떨어지도록 만든 도구다.
이 숟가락이 널리 퍼진 건 각설탕이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1870년대 중반부터다. 1880~90년대를 지나며 압생트가 국민 음료가 되자 숟가락도 함께 흔해졌고, 곧 온갖 모양으로 갈라졌다. 나뭇잎, 에펠탑, 하트, 격자무늬 — 저마다 정교하게 뚫린 문양이 유행했고, 증류소들은 자기 상표를 새긴 숟가락을 만들어 광고로 뿌렸다. 오늘날 골동품 시장에서는 이 시절의 압생트 숟가락과 잔, 분수를 통틀어 **압생티아나(absinthiana)**라 부르며 수집한다. 술은 사라졌어도 그 소도구들은 남아 한 시대의 취향을 증언한다.

물을 흘리는 분수
한두 잔이면 물병으로 족하지만, 카페에서 여럿이 함께 마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나온 것이 **압생트 분수(fontaine à absinthe)**다. 얼음물을 채운 큼직한 유리통에 꼭지가 서넛 달려 있어, 각자 자기 잔 위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도록 꼭지를 조절해 둔다. 손으로 물병을 들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 사람들은 잔이 천천히 흐려지는 동안 손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분수의 쓸모는 결국 '천천히'에 있다. 압생트는 물이 조금씩 스며들어야 향이 곱게 열리고 루슈도 균일하게 오른다. 분수는 그 느린 속도를 사람 손 대신 유지해 주는 장치였다. 잔과 숟가락과 분수 — 압생트를 둘러싼 이 세 물건은 하나같이 "서두르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초록의 시간
19세기 말 파리에서 오후 다섯 시 무렵은 **초록의 시간(l'heure verte)**이라 불렸다.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카페에 앉아 압생트를 흐리기 시작하는 시각이었다. 도수 높고 향 짙은 이 초록 술은 곧 도시의 습관이 됐고, 사람들은 술에 **초록 요정(la fée verte)**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특히 화가와 시인들이 압생트를 곁에 뒀다. 드가는 카페에 멍하니 앉은 여인과 그 앞의 압생트 잔을 그린 「압생트 한 잔」(1876)을 남겼고, 마네와 툴루즈 로트레크, 반 고흐, 그리고 랭보와 베를렌, 오스카 와일드가 이 술을 마셨다. 와일드는 압생트 석 잔을 마신 뒤의 감각을 두고 이런 저런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지고, 헤밍웨이는 뒷날 압생트를 넣은 칵테일 하나에 「오후의 죽음」이라는 제 소설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값싸고 독해서 누구나 마실 수 있었던 술이, 동시에 예술가들의 술로 신화화된 것이다.
초록 요정에서 악마로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압생트에는 향쑥에서 나온 **투욘(thujone)**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환각과 광기를 부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압생트를 마시면 미친다는 '압생티슴'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당시 향쑥 기름을 짐승에게 먹여 발작을 일으킨 실험 같은 것이 근거로 동원됐지만, 정작 잔에 담긴 압생트 속 투욘의 양은 아주 적었다. 진짜 문제는 70도에 육박하는 높은 도수, 그리고 값싼 술에 색을 내려고 섞은 유해한 첨가물 쪽이었다.
방아쇠를 당긴 건 1905년의 한 사건이었다. 스위스에 살던 프랑스인 노동자 **장 랑프레(Jean Lanfray)**가 그해 8월, 임신한 아내와 두 어린 딸을 살해했다. 그는 그날 아침부터 와인과 독주를 잔뜩 들이켠 상태였고, 그 가운데 압생트도 두 잔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다른 모든 술을 제쳐 두고 오직 압생트만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압생트를 금지하자는 청원에 8만 명이 넘게 서명했고, 스위스는 1908년 국민투표를 거쳐 1910년 압생트를 헌법으로 금지했다.
여기에 포도주 업계의 이해와 금주 운동의 물결이 겹쳤다. 값싼 압생트가 와인 시장을 잠식한다고 여긴 포도주 생산자들에게 이 술은 눈엣가시였다. 압생트는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미국이 1912년에, 프랑스가 1915년 초에 압생트를 금지했다. 1차 세계대전을 앞둔 프랑스에서 '국민을 병들게 하는 술'이라는 낙인은 그대로 법이 됐고, 초록 요정은 그렇게 한 세기 가까이 잔에서 사라졌다.
다시 흐려지다
압생트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건 아니었다. 영국은 애초에 압생트를 금지한 적이 없어, 20세기 말 이곳을 통해 부활의 불씨가 살아났다. 1990년대 체코산 압생트가 영국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이 누명을 벗겨 준 것도 이때다. 옛 압생트 병을 분석해 보니 투욘 함량은 광기를 부를 수준과 거리가 멀었다. 유럽연합은 투욘 상한선을 정해 압생트 생산을 허용했고, 미국은 2007년, 그토록 완강하던 프랑스마저 2011년에 100년 묵은 금지령을 풀었다. 초록 요정은 악마가 아니라 그저 도수 높은 술이었을 뿐이라는 결론이었다.
다만 부활의 길에서 엉뚱한 의식 하나가 끼어들었다. 각설탕에 압생트를 적셔 불을 붙인 뒤 그 캐러멜을 잔에 떨어뜨리는 이른바 '체코식' 방법이다. 불꽃이 극적으로 보이니 술집에서 곧잘 연출하지만, 이건 1990년대에 만들어진 마케팅용 퍼포먼스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렇게 마시는 체코 압생트 중에는 아니스가 부족해 물을 부어도 제대로 흐려지지 않는 것이 많았다. 불을 붙이는 압생트에는 정작 압생트의 핵심인 루슈가 없는 셈이다. 보헤미아의 유리 장인들이 크리스탈의 명성을 쌓아 올린 바로 그 땅에서, 압생트만은 불꽃이라는 겉멋에 밀려 제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압생트를 제대로 마시는 법은 결국 기다리는 법이다. 잔의 눈금까지만 술을 채우고, 숟가락을 걸쳐 각설탕을 올리고, 분수의 꼭지를 잠그듯 열어 물을 한 방울씩 떨어뜨린다. 초록이 우유처럼 풀리고 향이 열릴 때까지, 손을 놓고 잠깐 기다린다. 다른 술은 따르면 곧장 마시지만, 이 술은 흐려지기를 기다려야 비로소 한 잔이 된다. 잔과 숟가락과 분수가 하나같이 붙들고 있던 말이 바로 그것이다 — 서두르지 말 것.
루슈 원리·압생트 숟가락(1870년대 각설탕 대량생산)·저수통 잔·퐁타를리에 잔·압생트 분수·압생티아나 — Wikipedia "Absinthe", "Absinthiana" · 장 랑프레 살인 사건(1905)과 스위스(1910)·프랑스(1915) 금지 — Wikipedia "Jean Lanfray" · 미국(2007)·프랑스(2011) 재허가와 투욘 관련 서술 — Wikipedia "Absinthe" 및 관련 보도 참고. 드가 「압생트 한 잔」(1876) 등 예술가 관련 일화는 널리 알려진 전거를 따름.
이미지 — Wikimedia Commons: 루슈 3단계 Phoney (CC BY-SA 3.0) · 저수통 잔 Eric Litton (CC BY-SA 2.5) · 스푼과 각설탕 Cornischong (CC BY-SA 3.0) · 압생트 분수 Rama (CC BY-SA 2.0 fr) · 불붙인 스푼 spacepleb (CC BY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