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손에 쥐어본 잔이 있다. 두껍고 묵직하고, 옆면에 세로로 깎은 면이 빙 둘러 있는 유리컵. 식당에도, 기차역에도, 부엌 찬장에도, 길거리 자판기에도 똑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이름은 그라뇨니 스타칸(гранёный стакан) — 그대로 옮기면 '깎은 면이 있는 컵'이다. 특별할 것 없는 물건처럼 보이지만, 이 컵 하나에 20세기 소련의 일상이 거의 통째로 담겨 있다.
깎은 면은 장식이 아니다
옆면을 세로로 깎은 면들 — 러시아어로 '그란(грань)' — 은 멋을 내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먼저 깎은 면은 잔을 튼튼하게 한다. 평평한 면과 모서리가 압력을 분산시켜, 두꺼운 바닥과 더불어 어지간히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는다. 식탁에서 굴러떨어져도 멀쩡한 컵이라는 평판은 여기서 나왔다.
깎은 면은 또 손에 쥐기 좋게 한다. 젖은 손이나 기름 묻은 손으로도 미끄러지지 않고, 모서리 덕에 식탁 위에서 잘 구르지도 않는다. 빛을 받으면 면마다 반사가 갈라져, 값싼 압착 유리에도 약간의 반짝임을 준다. 튼튼함, 쥐기 편함, 구르지 않음 — 디자인이라기보다 쓰임에서 나온 형태다.

세로로 깎은 면과 윗부분의 매끈한 띠. 면의 수는 보통 16개였지만 10개, 12개, 20개짜리도 있었다. 깎은 면은 멋이 아니라 강도와 쥐는 맛을 위한 것이다.
윗부분에 면 없이 매끈하게 둘린 띠도 그냥 둔 게 아니다. 입술이 닿는 가장자리를 매끄럽게 하고, 동시에 눈금 역할을 했다. 이 띠가 다음 이야기의 핵심이 된다.
200밀리리터라는 약속
그라뇨니 스타칸은 규격이 정해진 컵이었다. 매끈한 띠 선까지 따르면 200밀리리터, 가장자리 끝까지 채우면 250밀리리터. 이 두 숫자는 소련 사람이라면 몸으로 알고 있던 단위였다.
소련의 요리책은 계량컵 대신 '스타칸'으로 분량을 적었다. "밀가루 두 스타칸, 설탕 한 스타칸" 하는 식이다. 어느 집 부엌에나 같은 컵이 있으니, 그 컵 자체가 표준 계량 도구가 됐다. 규격이 통일된 잔 하나가 나라 전체의 레시피를 맞춰준 셈이다.
규격은 술자리에도 그대로 들어왔다. 보드카는 0.5리터 병으로 팔렸고, 이걸 세 사람이 나누면 그라뇨니 스타칸으로 잔마다 엇비슷한 높이가 됐다. 여기서 '사브라지치 나 트로이흐(сообразить на троих)' — 직역하면 '셋이서 궁리하다' — 라는 표현이 나왔다. 모르는 사람 셋이 가게 앞에서 돈을 모아 한 병을 사고, 그 자리에서 나눠 마신다는 뜻이다.
공공장소 음주를 단속하던 시절, 한 병을 빨리 셋으로 나눠 비우는 이 방식은 하나의 풍습이 됐다. 잔의 규격이 사람 수까지 정해준 셈이다. 그라뇨니 스타칸은 마시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나눔의 단위였다.
누가 디자인했나 — 무히나 전설
이 컵의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거의 언제나 한 이름이 나온다. 조각가 베라 무히나(Вера Мухина) — 모스크바를 상징하는 거대한 조각 〈노동자와 콜호스 여인〉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통설은 이렇다. 1943년, 무히나가 소련의 새 식당용 식기세척기에 견딜 수 있도록 두껍고 튼튼한 컵을 다시 설계했고, 그해 9월 11일 구스흐루스탈니의 유리공장에서 첫 제품이 나왔다고. 러시아에서 9월 11일을 '그라뇨니 스타칸의 날'로 부르는 것도 여기서 비롯됐다.
다만 이 이야기는 사실과 전설이 섞여 있다. 무히나가 그 시기 소련의 유리·도자 디자인에 관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이 컵을 직접 디자인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1차 자료는 빈약하고,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다. 식기세척기에 맞춰 설계됐다는 설명 역시 자주 인용되지만 확실히 못 박기는 어렵다. 분명한 건 1943년 구스흐루스탈니에서 이 규격의 컵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했고, 그 형태가 이후 반세기 소련의 표준이 됐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오래된 내력

쿠즈마 페트로프-보드킨, 〈아침의 정물〉(1918). 받침 접시 위 차가 담긴 잔이 바로 깎은 면의 유리컵이다 — 소련식 규격이 정해지기 한참 전부터 러시아인의 식탁에 있었다.
깎은 유리컵 자체는 소련의 발명품이 아니다. 면을 깎은 두꺼운 유리잔은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있었다. 화가 페트로프-보드킨이 1918년에 그린 정물화 〈아침의 정물〉에도 깎은 면의 유리컵이 또렷이 등장한다 — 소련식 규격이 나오기 한참 전이다.
여기엔 더 오래된 전설도 따라붙는다. 표트르 대제 시절, 한 유리 장인이 깨지지 않는 컵이라며 황제에게 깎은 유리컵을 바쳤고, 표트르가 술을 비운 뒤 바닥에 던졌더니 컵은 보란 듯이 깨졌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황제가 그 컵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둥, "스타칸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는 둥의 말이 전한다. 술자리에서 잔을 깨는 러시아 풍습의 기원으로 끌어다 쓰이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깎은 컵이 소련 이전부터 러시아인의 손에 익은 물건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소련은 그것을 발명한 게 아니라, 하나의 규격으로 통일했을 뿐이다.
거리에 매달린 공동의 잔
그라뇨니 스타칸이 가장 소련다웠던 순간은 거리에서였다. 도시 곳곳에는 탄산수 자판기가 있었다. 동전을 넣으면 시럽을 탄 물이나 맹물 탄산수가 나오는 기계인데, 종이컵 같은 건 없었다. 대신 기계 옆에 그라뇨니 스타칸 한 개가 매여 있거나 놓여 있었다. 마신 사람은 그 자리의 작은 분수에 컵을 엎어 헹구고, 다음 사람이 같은 컵으로 마셨다.
낯선 이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 같은 잔으로 마신다는 것 — 위생 관념으로 보면 아찔하지만, 그 시절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잔. 이 공동의 컵만큼 소련의 집단주의를 잘 보여주는 물건도 드물다.

소련 시절 거리의 탄산수(газированная вода) 자판기. 종이컵 대신 공용 그라뇨니 스타칸으로 마셨다 — 한 사람이 헹궈 두면 다음 사람이 같은 컵으로 마셨다.
식당(스탈로바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생긴 컵이 수백 개씩 쌓여 차와 키셀, 콤포트를 담았다. 값싸고, 튼튼하고, 어디에나 있고, 누구의 것도 아니다 — 그라뇨니 스타칸은 그 자체로 소련이 지향한 평등의 작은 표본이었다. 비싼 잔도 귀한 잔도 없이, 다 같은 컵으로 마신다.
평범함이 남긴 것
소련이 무너지면서 이 컵도 무대에서 내려왔다. 일회용 컵과 다양한 유리잔이 들어왔고, 공용 잔으로 마시는 풍습은 사라졌다. 자판기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한때 나라 전체의 식탁을 채웠던 컵이, 이제는 벼룩시장과 할머니 찬장에서나 보이는 물건이 됐다.
그러나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그라뇨니 스타칸은 향수의 대상이 됐다. 깨지지 않던 두께, 손에 익은 무게, 200밀리리터라는 약속, 거리에서 낯선 이와 나눠 쓰던 한 잔. 그 안에는 한 시대의 검소함과 집단의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잔은 보통 그것이 담은 술로 기억되지만, 이 컵은 그것이 담은 시대로 기억된다. 깎은 면 열여섯 개에 한 나라의 일상이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깎은 유리컵(그라뇨니 스타칸) — George Shuklin / Wikimedia Commons (CC BY-SA 1.0) · 〈아침의 정물〉(1918), 쿠즈마 페트로프-보드킨 —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