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쥐면 표면이 매끈하지 않다. 녹다 만 얼음덩이나 고드름이 흘러내린 자국처럼, 세로로 울퉁불퉁한 결이 잔을 덮고 있다. 핀란드 유리 브랜드 이딸라의 울티마 툴레(Ultima Thule) — 1968년에 나온 이 잔은, 위스키를 얼음과 함께 따라 마시기 좋은 두툼한 텀블러이면서, 동시에 핀란드 디자인을 대표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저 울퉁불퉁한 표면은 멋을 내려고 새긴 무늬가 아니다.
녹는 얼음을 본뜬 표면
울티마 툴레를 디자인한 사람은 핀란드의 타피오 비르칼라(Tapio Wirkkala, 1915–1985)다. 20세기 핀란드 디자인을 세계에 알린 인물로, 평생의 많은 시간을 북쪽 끝 라플란드의 통나무 오두막에서 보냈다. 그곳의 얼음과 눈, 봄이 오면 녹기 시작하는 얼음의 표면이 그의 작업에 거듭 등장했다.
울티마 툴레의 결은 바로 그 녹는 얼음을 옮긴 것이다. 매끈한 유리에 무늬를 새긴 게 아니라, 얼음이 녹아내릴 때의 거친 표면 자체를 잔에 옮겨 담으려 했다. 그래서 이 잔은 빛을 받으면 면마다 다르게 반짝이고, 손에 쥐면 매끈한 유리와는 전혀 다른 촉감이 잡힌다.

이딸라 울티마 툴레. 세로로 흘러내리는 결은 새긴 무늬가 아니라, 불에 타는 나무 틀에 유리를 불어 넣어 얻은 흔적이다.
나무 틀이 타며 만들어지는 무늬
이 표면이 만들어지는 방식이 울티마 툴레의 핵심이다. 비르칼라는 나무를 깎아 틀(거푸집)을 만들었다. 여기에 1000도가 넘는 뜨거운 유리를 불어 넣으면, 유리의 열기에 나무 틀이 타들어 가면서 그을음과 수증기가 일어난다. 이 타는 과정이 유리 표면에 고드름이 흘러내린 듯한 거친 결을 남긴다.

타피오 비르칼라 디자인, 이딸라 제작. 잔마다 결이 조금씩 다른 것은, 틀이 한 번 쓸 때마다 타들어 가 똑같은 무늬가 두 번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틀이 탄다는 것은, 한 번 유리를 불 때마다 틀의 모양이 조금씩 망가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느 잔도 결이 완전히 똑같지 않고, 틀은 일정 횟수를 쓰면 다시 깎아야 한다. 공장에서 같은 모양을 무한정 찍어내는 보통의 유리 제품과는 반대다. 이딸라는 이 방식을 '아이스 글라스(ice glass)' 기법이라 불렀고, 비르칼라는 이 기법을 여러 해에 걸쳐 다듬었다. 손이 많이 가고 틀을 계속 새로 만들어야 하니, 값이 비싼 데는 이유가 있다.
비르칼라와 핀란드 유리
이딸라는 1881년에 세워진 핀란드의 유리공장이다. 20세기 중반, 비르칼라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이 이딸라와 함께 내놓은 유리 제품들은 핀란드 디자인의 황금기를 이뤘고, 지금도 핀란드 가정의 식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비르칼라의 얼음 미학이 가장 널리 퍼진 곳은 뜻밖에도 술병이었다. 1970년, 그는 핀란디아(Finlandia) 보드카의 병을 디자인했다. 표면을 빙하의 얼음처럼 만든 그 병은 1999년까지 거의 30년간 생산되며 핀란디아 브랜드의 얼굴이 됐다. 울티마 툴레와 같은 손, 같은 발상에서 나온 형태다. 잔이든 병이든, 비르칼라가 다룬 유리는 북쪽 땅의 얼음을 닮아 있었다.
위스키 잔으로서
울티마 툴레는 잔, 보울, 물병까지 여러 형태로 나오는데, 술과 관련해 가장 자주 쓰이는 건 바닥이 두툼한 텀블러, 이른바 온더록스(올드 패션드) 잔이다. 얼음을 한두 개 넣고 위스키를 따라 마시기에 맞는 크기와 무게다.
이 잔은 향을 모으는 노징 글라스가 아니다. 글렌캐런이나 코피타처럼 입구를 좁혀 향을 끌어올리는 잔과는 목적이 다르다. 울티마 툴레는 입이 넓게 트인 락 글라스라, 향을 가두기보다 얼음과 함께 한 모금을 시원하게 즐기는 쪽에 가깝다. 대신 표면의 거친 결이 얼음과 만나 빛을 흩뜨리고, 손에는 차갑고 우툴두툴한 감촉을 준다. 마시는 동안 잔 자체가 얼음덩이처럼 느껴지도록 만든 셈이다. 위스키를 어떻게 더 잘 '맡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더 '차갑게 쥐고 보느냐'에 답한 잔이다.
출시 직후인 1969년부터 울티마 툴레는 핀에어 기내에서 쓰였고, 핀란드를 찾은 손님에게 건네는 선물로도 자주 등장했다. 핀란드가 자기 나라를 보여주고 싶을 때 내미는 유리였던 셈이다.
가장 북쪽의 잔
'울티마 툴레'는 옛 유럽에서 알려진 세계의 가장 북쪽 끝, 그 너머의 미지의 땅을 부르던 말이다. 라플란드의 얼음에서 출발한 잔에 붙기에 이보다 맞는 이름도 없다. 보통 잔은 그것이 담는 술로 기억되지만, 이 잔은 그것이 본뜬 풍경으로 기억된다. 위스키 한 잔에 얼음을 넣어 쥐면, 손안에 라플란드의 녹는 얼음 한 조각을 들고 있는 셈이 된다.
울티마 툴레 유리잔 — Grigur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 울티마 툴레 제품군 — Nasjonalmuseet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