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반에 반쯤 남은 위스키가 몇 병 있다. 하나는 작년 생일에 딴 거고, 하나는 언제 땄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거 아직 마셔도 되나?
마셔도 된다. 도수 40% 넘는 술은 상하지 않는다. 세균이 살 수 없으니까. 질문은 맛이 그대로냐는 거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갈린다.

흔히 말하는 기준
위스키 회사들이 내놓는 조언은 대체로 비슷하다. 병이 반쯤 비면 작은 병에 옮기거나 빨리 마셔라. 발렌타인은 남은 양에 따라 6개월에서 2년 안에 마시라고 하고, 아란 증류소는 마개를 잘 닫은 병이 절반 이상 차 있으면 몇 달에서 2년까지 맛이 유지된다고 한다.
브룩라디의 마스터 디스틸러였던 짐 매큐언은 2005년 홍보 투어에서 병이 반쯤 비면 눈에 띄게 변하기까지 6개월 정도라고 말했다. 호주의 위스키 블로그 Whisky & Wisdom이 이 말을 전하면서 하나를 덧붙였다. '눈에 띄게'라는 건 주관적이고, 6개월에서 1년 전에 마신 맛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숫자보다 먼저 무엇이 변하는지부터 보는 게 낫다.
산화라고 부르지만
병을 따고 시간이 지나 맛이 밋밋해지면 다들 '산화됐다'고 한다. 와인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말이다. 와인은 따 놓으면 산소와 반응해서 하루 이틀 만에 시큼해진다.
위스키는 사정이 다르다. 도수가 높아서 와인처럼 산소와 활발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이 아예 없진 않지만 작다. Whisky & Wisdom은 실제 화학 반응은 "큰 그림에서 보면 아주 사소하다"고 쓰면서 예외로 황 화합물을 꼽았다. 셰리 캐스크 위스키에서 가끔 나는 성냥 냄새 같은 황 성분은 시간이 지나며 산화되어 줄어든다. 피트 위스키의 스모키함을 내는 페놀도 산화되기 쉬운 편이라, 오래 열어 둔 아일라 위스키는 연기 냄새가 먼저 빠진다.
그 밖의 변화는 대부분 산소보다 공기 자체 때문이다. 병 안에 빈 공간이 생기면 위스키의 향 성분 일부가 그 공간으로 증발해 나간다. 분자가 작고 가벼운 에스테르, 그러니까 과일 향이나 꽃 향을 내는 성분이 먼저 빠진다. 그리고 병을 열 때마다 그 향이 밴 공기는 밖으로 나가고 새 공기가 들어온다. 따를 때마다 향을 조금씩 버리는 셈이다.
알코올도 같이 빠진다. 에탄올은 물보다 잘 증발하니까 병 속 빈 공간에는 알코올 비율이 높은 기체가 찬다. 위스키 분석 사이트 Whisky Analysis는 이것 때문에 남은 위스키가 아주 조금씩 묽어진다고 설명한다. 다만 이론상 그럴 법하다는 것이지 실제로 잰 결과는 아니라고 스스로 밝혔다.
빈 공간이 클수록 이 효과는 커진다. 병이 가득 차 있으면 위스키 위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공기뿐이지만, 바닥에 한두 잔 남으면 병 전체가 공기다. 반쯤 남은 병이 기준선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이거다.
블라인드로 마셔 보면
그럼 실제로 얼마나 변할까. 아마추어지만 꽤 공들인 실험들이 있다.
미국 버번 사이트 Breaking Bourbon은 같은 버번을 여러 조건으로 나눠 2년 동안 보관하면서 6개월, 12개월, 24개월에 블라인드로 맛을 봤다. 어두운 벽장, 냉장고, 직사광선 아래, 그리고 주기적으로 열어서 따라 마시는 병. 양도 가득, 3분의 2, 3분의 1로 나눴다. 시음자는 세 명이었다.
24개월 뒤 결론은 이랬다. 공기의 영향은 생각보다 작았다. 맛이 망가졌다기보다 조금 다른 쪽으로 바뀐 정도였고, 블로그는 증거로 보면 영향이 "아주 작다"고 썼다. 어두운 벽장에 3분의 1만 남겨 둔 병은 오히려 세 명 모두 그 조 안에서 가장 좋다고 골랐다. 주기적으로 열어 따른 병도 변화가 크지 않았다.

망가진 건 햇빛을 받은 병이었다. 직사광선 아래 둔 투명한 병에서는 고무, 플라스틱, 썩은 사과, 페인트 시너 같은 냄새가 났고 색도 많이 빠졌다. 특히 햇빛 아래 3분의 1만 남긴 병은 매번 꼴찌였다. 같은 햇빛이라도 갈색 병은 훨씬 나았다. 공기와 햇빛이 겹치면 더 나빠진다는 것도 이 실험에서 나왔다.
Whisky Analysis는 다른 블라인드 테스트 두 개도 정리해 놨다. 하나는 1년 동안 열어 둔 병과 새 병을 놓고 열 명이 삼점 검사를 했는데, 셋 중 다른 하나를 맞힌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기기 분석에서도 주요 성분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다. 또 하나는 6개월짜리로, 여섯 명 중 두 명만 맞혔다. 찍어서 맞힐 확률과 같은 수준이다.
물론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는 휘발 성분만 잡아낸다는 반론이 댓글에 달렸고, 시음자가 몇 명 안 된다는 한계도 있다. 그래도 방향은 분명하다. 병 속 공기가 위스키보다 많아지기 전까지, 그리고 햇빛만 피한다면,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변화는 블라인드로 구별하기 어렵다.
오히려 나아지는 경우
병을 딴 직후 첫 몇 잔은 알코올이 톡 쏘고 향이 닫혀 있다가, 2~3주 지나면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도 흔하다. Whisky & Wisdom은 이걸 병목에 몰려 있던 거친 휘발 성분이 빠져나가서라고 본다. 앞의 Breaking Bourbon 실험에서도 6개월 시점에 벽장과 냉장고 샘플은 공기에 노출된 쪽이 오히려 나았다는 평이 나왔다.
반대로 약한 위스키는 빨리 무너진다. 섬세한 꽃 향이 중심인 위스키, 40%로 물을 많이 탄 위스키, 25년 넘게 숙성한 고숙성 위스키가 그렇다. 피트가 세거나 캐스크 스트렝스이거나 와인 캐스크 피니시처럼 맛이 진한 위스키는 변화가 있어도 잘 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보관할까
세워 둔다. 와인은 코르크가 마르지 않게 눕히지만 위스키는 반대다. 도수가 높은 술에 코르크가 오래 닿아 있으면 코르크가 상하고 그 맛이 술에 밴다.
햇빛을 피한다. 위 실험에서 가장 확실하게 맛을 망친 원인이다. 거실 장식장 유리문 안도 낮에 햇빛이 들면 안전하지 않다. 상자에 넣어 찬장에 두는 게 제일 낫다. 온도는 높낮이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문제다. 온도가 바뀌면 병 속 공기가 팽창하고 수축하면서 마개 틈으로 향과 알코올이 새어 나간다.
반 넘게 비면 작은 병에 옮긴다. 공기를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영국의 위스키 블로그 Whiskipedia가 라프로익 10년으로 1년 동안 실험한 결과가 이걸 잘 보여 준다. 새로 딴 병과 얼마나 같은지를 1~5점으로 매겼는데, 5센티리터 작은 병에 가득 채우고 왁스로 봉한 샘플은 12개월 내내 5점이었다. 왁스 없이 채우기만 한 작은 병도 12개월에 4점이었다.
작은 병은 유리병에 마개가 꽉 닫히는 걸로 고른다. Whisky Analysis는 갈색이나 파란색 유리병에, 안쪽에 원뿔형 패킹이 달린 폴리프로필렌 마개를 권한다. 종이 패킹이 든 마개는 오래 두면 상해서 술에 냄새가 밸 수 있다. 플라스틱 PET 병은 장기 보관용으로는 피하는 게 낫다.
가스 스프레이와 진공 마개는 기대보다 별로다. 같은 Whiskipedia 실험에서 와인용 불활성 가스 스프레이를 뿌린 병은 12개월에 3점, 진공 펌프 마개를 쓴 병은 9개월에 이미 1점, 그러니까 "다른 위스키 같다"는 평가였다. 진공은 위스키 위의 공기를 빼는 동시에 향 성분도 같이 빨아내니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Whisky Analysis가 인용한 다른 실험에서도 가스 스프레이 쪽이 그냥 공기에 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이 변했다. 와인용 가스 스프레이에는 아르곤만 든 게 아니라 부탄이나 프로판 같은 분사제가 섞인 경우가 있다는 점도 짚어 둘 만하다.
유리구슬을 넣어 수위를 높이는 방법도 있다. 효과는 있지만, 식품용 유리구슬을 구해서 깨끗이 씻어 넣고 다시 꺼내 닦는 수고를 생각하면 그냥 작은 병에 옮기는 게 편하다.
크리스털 디캔터는 따라 마실 때만. 보기엔 좋지만 장기 보관에는 맞지 않는다. 유리문 장식장에서 빛을 받기 쉽고, 마개가 꽉 닫히지 않는 것도 많다. 납 크리스털이라면 더 그렇다. 이건 위스키 디캔터 글과 잔의 재질과 납 이야기에 자세히 적어 뒀다.
결국 언제까지

딱 떨어지는 숫자는 없다. 그래도 정리하면 이 정도다.
- 절반 넘게 남은 병은 어둡고 서늘한 곳에 세워 두면 1년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블라인드로 구별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 절반 아래로 내려가면 그때부터 신경 쓴다. 6개월쯤 안에 마시거나 작은 병에 옮긴다.
- 바닥에 한두 잔 남은 병은 미루지 말고 마신다. 병 대부분이 공기다.
- 섬세한 위스키, 고숙성 위스키, 피트 향이 매력인 위스키는 이보다 서두른다.
가장 확실한 보관법은 Whisky & Wisdom이 쓴 대로 빨리 마시는 것이다. 열어 둔 병이 열 병쯤 되면 어느 것도 제때 못 마신다. 새 병을 따기 전에 바닥 보이는 병부터 비우자.
Breaking Bourbon, "Bourbon Storage Experiment: 24 Month Tasting Results" · Whisky Analysis, "How Best to Store Your Whisky", 2019 · Whisky & Wisdom, "Oxidation – does whisky go off in the bottle?" · Whiskipedia, "Preventing Oxidisation" · Arran Whisky, "Does whisky go bad?" · Ballantine's, "Can whisky expi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