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바닥이 평평하지 않다. 한가운데가 둔덕처럼 불룩 솟아 있고, 위스키는 그 둔덕을 빙 둘러싸고 고리 모양으로 고인다. 세트를 사면 묵직한 금속 받침이 하나 따라온다. 이건 냉동실에 넣어 두라고 준 물건이다.

만든 곳은 푸조다. 자동차 말고, 후추 그라인더 쪽 푸조.

금속 냉각 받침 위에 놓인 푸조 위스키 테이스팅 잔. 바닥 가운데 돔 둘레로 위스키가 고여 있다
얼린 금속 받침 위에 잔을 올려 두는 방식이다 (사진: Peugeot Saveurs 제품 이미지)

후추 그라인더 회사가 잔을 판다

푸조 집안 이야기는 1810년에 시작한다. 장피에르와 장프레데리크 푸조 형제가 프랑스 동부 두(Doubs) 지방에서 물레방아 공장을 제강소로 바꾼 게 출발이었다. 처음엔 강철 띠와 톱을 만들었고, 1840년에 커피 그라인더, 1874년에 후추 그라인더가 나왔다. 자동차는 한참 뒤의 일이다.

지금 주방용품을 만드는 푸조 소뵈르(Peugeot Saveurs)는 자동차 회사와 뿌리만 같고 사업은 따로 간다. 그라인더 홈 깎는 기술로 이름을 얻은 회사답게, 와인 쪽으로 넘어와서도 디캔터, 에어레이터, 코르크 따개 같은 도구를 주로 만든다.

잔은 그중에서 좀 의외의 품목이다. 그리고 이 잔은 푸조가 처음부터 만든 게 아니다.

'Peugeot Frères Valentigney' 명판이 붙은 20세기 전반의 나무 커피 그라인더

20세기 전반의 푸조 커피 그라인더. 명판에 'Peugeot Frères, Valentigney (Doubs)'라고 찍혀 있다 (사진: Celeda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무자비한 잔'이라는 이름

레 쟁피투아야블(Les Impitoyables)은 1984년 자크 파스코(Jacques Pascot)가 만든 와인 시음 잔 시리즈다. 이름을 옮기면 '무자비한 것들'쯤 된다. 와인의 좋은 점만 띄워 주는 게 아니라 결점까지 가차 없이 드러낸다는 뜻이다. 당시 잔에는 파스코의 이름과 1984라는 연도가 새겨져 있었고, 지금도 중고 시장에 그 각인이 찍힌 잔이 돌아다닌다.

이 시리즈가 나중에 푸조 소뵈르로 넘어갔고, 위스키 버전이 거기에 추가됐다. 언제 넘어왔는지, 위스키 잔은 누가 설계했는지는 푸조가 따로 밝히지 않는다. 용량은 29cl과 38cl 두 가지가 팔리고, 받침까지 든 세트는 미국 공식몰 기준 50달러대다.

와인잔 시절부터 이 시리즈의 버릇은 같았다. 잔의 모양을 평범하게 두지 않는다. 몸통이 이상하게 꺾이거나, 바닥이 움푹 들어가거나. 위스키 잔에서는 그 버릇이 바닥의 돔으로 나타났다.

바닥 한가운데의 혹

빈 푸조 위스키 잔을 옆에서 본 모습. 바닥 가운데 솟은 돔 안쪽으로 받침의 금속 부분이 보인다

빈 잔으로 보면 바닥 가운데 돔이 잘 보인다. 돔 아래는 비어 있어서 받침 가운데의 금속 부분이 그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사진: Peugeot Saveurs 제품 이미지)

푸조가 내세우는 설명은 짧다. 알코올 증기가 잔 가운데로 몰리는데, 돔이 그걸 옆으로 흩어서 코를 찌르는 느낌을 줄인다는 것이다.

조건이 하나 붙는다. 돔 꼭대기보다 낮게 따라야 한다. 위스키가 봉우리를 덮어 버리면 그냥 바닥이 좀 높은 잔이 된다. 리뷰 사이트 Bespoke Unit도 이 점을 가장 먼저 짚었다. 꼭대기 바로 아래까지만 붓고, 넘치게 따르지 말라고.

그러면 정말 알코올은 가운데로 몰릴까.

이 질문에 가장 가까운 실험이 하나 있다. 2015년 일본 연구팀(아라카와 다카히로 외)이 학술지 Analyst에 발표한 '스니퍼 카메라' 연구다. 에탄올 증기에 반응해 빛을 내는 효소 막을 잔 위에 덮고, 잔 입구에서 에탄올이 어떻게 퍼지는지 사진으로 찍었다. 13도 와인을 담은 와인잔에서는 가장자리를 따라 고리 모양으로 에탄올 농도가 높았고, 가운데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와인잔이 가운데로 향을 맡기 좋게 생긴 이유를 보여 준 결과로 자주 인용된다.

그대로 옮겨 오면 푸조의 설명과는 방향이 반대다. 적어도 와인잔에서는 알코올이 가운데로 몰리지 않았다. 물론 그 실험은 도수 13% 와인이었고 잔 모양도 다르다. 40도가 넘는 위스키를 이 잔에 담고 같은 측정을 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그러니 맞다, 틀리다를 말할 근거가 양쪽 다 없다. 지금 있는 건 제조사의 설명뿐이다.

와인병 바닥 안쪽으로 솟아오른 펀트
와인병 바닥의 펀트. 바닥을 안쪽으로 밀어 올리는 모양 자체는 유리 공예에서 오래된 것이다. 이 잔은 그 혹을 술이 닿는 쪽에 둔 셈이다 (사진: Patrick Heusser / Wikimedia Commons, CC BY 3.0)

내 짐작은 이렇다. 돔이 하는 일 중에 확실한 건 따르는 양을 정해 준다는 것이다. 38cl짜리 넓은 보울에 꼭대기 아래까지만 따르면 한 잔이 꽤 적다. 넓은 잔에 적게 따르면 술 위로 공기 공간이 크게 남고, 코에 닿기 전에 증기가 그만큼 묽어진다. 알코올이 덜 찌르는 효과가 있다면 돔의 기하학보다 이쪽이 더 큰 몫일 가능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다.

비슷한 고민을 다르게 푼 잔이 NEAT 글라스다. NEAT은 림을 바깥으로 벌려 에탄올을 옆으로 흘려보낸다. 푸조는 바닥을 건드렸다. 같은 문제를 위와 아래에서 접근한 셈이다.

얼린 받침

세트의 나머지 절반은 금속 받침이다. 냉동실에 두 시간쯤 넣었다가 꺼내서 잔을 올리면, 23분 뒤 위스키가 58도까지 내려간다고 푸조는 설명한다. 얼음이 아니니 녹아서 묽어질 일이 없고, 차가운 잔에 상온 술을 붓는 식의 급격한 온도 변화도 피할 수 있다는 게 장점으로 꼽힌다.

제품 사진을 보면 돔 아래쪽이 비어 있고, 받침 가운데의 금속 부분이 그 빈 공간으로 들어가 앉는다. 차가운 금속이 술에 가장 가까이 닿는 자리가 바로 돔인 셈이다. 그렇다면 돔은 알코올을 흩는 일 말고 냉각에도 한몫한다고 볼 수 있다. 푸조가 그렇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모양만 보면 그렇다.

여기서 좀 이상한 지점이 생긴다. 5~8도는 냉장고 안 온도다. 잔을 차갑게 하는 이야기에서 쓴 것처럼, 위스키는 차가워질수록 향이 덜 올라온다. 향을 무자비하게 드러내겠다는 잔에, 향을 닫는 장치가 한 세트로 들어 있는 셈이다.

다만 이걸 꼭 모순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온도가 내려가면 에탄올도 덜 날아오른다. 캐스크 스트렝스처럼 코가 아플 만큼 센 술을 얼음이나 물 없이 순하게 만들고 싶을 때, 혹은 한여름에 미지근한 위스키가 싫을 때는 쓸모가 있다. 받침을 쓰다가 중간에 내려놓으면 잔이 다시 데워지면서 향이 천천히 열리는 것도 볼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갑게 마시라는 도구라기보다, 온도를 하나 더 고를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로 보는 편이 맞다.

결로는 각오해야 한다. 받침이 차가울수록 잔 바깥에 물방울이 맺힌다. 세트에 코스터가 같이 들어 있는 이유다.

써 본 사람들의 이야기

나는 이 잔을 써 보지 않았다. 그래서 써 본 사람들의 기록을 옮긴다.

Wine and Whiskey Globe는 2021년 리뷰에서 메이커스 마크를 이 잔과 일반 록스 잔에 나눠 따라 비교했다. 푸조 잔에서 부차적인 향이 더 또렷하게 올라왔고 캐러멜이 더 잘 잡혔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같은 문단에 "전체적으로 차이는 크지 않다"고 덧붙였다. 비교 대상이 노징 잔이 아니라 록스 잔이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Bespoke Unit은 돔의 효과보다 조건을 더 강조했다. 꼭대기 아래까지만 따라야 효과가 있다는 점, 그리고 크리스털로 보이지 않는 잔치고는 값이 비싸다는 점이다.

두 리뷰 모두 잔이 나쁘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결정적으로 좋다고 하지도 않았다.

살 만한가

글렌케언을 이미 쓰고 있고 불만이 없다면, 이 잔이 그 불만 없는 자리를 바꿔 놓을 근거는 아직 약하다. 돔에 대한 설명은 측정으로 뒷받침된 적이 없고, 리뷰에서 나온 차이도 작다.

대신 이런 사람에게는 생각해 볼 만하다. 고도수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코가 따가운 사람. 얼음은 싫은데 여름엔 차갑게 마시고 싶은 사람. 그리고 잔 하나에 이상한 설계가 들어가 있는 걸 그 자체로 즐기는 사람. 바닥에 혹이 솟은 잔은 식탁에 올려 두면 일단 대화가 하나 생긴다.

Image Sources

푸조 커피 그라인더 — Celeda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 와인병 바닥의 펀트 — Patrick Heusser / Wikimedia Commons (CC BY 3.0) · 잔과 냉각 받침 — Peugeot Saveurs 제품 이미지

References

Arakawa T. et al., "A sniffer-camera for imaging of ethanol vaporization from wine: the effect of wine glass shape", Analyst 140 (2015) · Peugeot Saveurs, Les Impitoyables Whisky Tasting Set 제품 설명 · Wine and Whiskey Globe, "These New Tasting Glasses from Peugeot Really Work" (2021.04.28) · Bespoke Unit, "Les Impitoyables N°5 With Chilling 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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