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구시가지의 오래된 선술집에서 "비뇨 도 파이스(viño do país), 틴토"라고 하면, 운이 좋으면 유리잔이 아니라 작은 하얀 사발이 나온다. 손잡이가 없고, 바닥에 낮은 굽이 하나 있을 뿐이다. 찻잔보다 조금 넓고 얕다. 거기에 주전자로 와인을 따라 준다.
와인은 거의 검은 보라색이다. 흰 바닥 위에 부어 놓으니 가장자리 쪽이 자줏빛으로 번져 보인다. 몇 모금 마시고 나면 입술과 혀가 같은 색이 된다.
이 사발을 갈리시아 말로 쿤카(cunca)라고 한다.

손바닥에 올려서 마신다
크기는 대충 정해져 있다. 높이 8센티미터 안팎에 125밀리리터, 옛날식으로 말하면 8분의 1리터쯤 들어간다. 바닥은 작고 평평하고, 몸통은 반구에 가깝다. 손잡이가 달린 것도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은 없다. 그래서 손가락으로 집기보다 손바닥을 펴서 받치듯 들고 마신다.
말은 라틴어 콘카(concha), 조개껍데기에서 왔다고 본다. 갈리시아 작가 알바로 쿤케이로(Álvaro Cunqueiro)의 성도 여기서 나왔다. 쿤케이로는 쿤카를 만들거나 파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이 사람은 갈리시아 음식에 관한 책을 썼고, 거기에도 쿤카가 나온다.
쿤카는 원래 와인 전용이 아니었다. 갈리시아식 수프인 칼도(caldo)도 쿤카에 떠서 마셨다. 부엌에 있는 사발에 국도 담고 술도 담았던 것이다. 우리 막걸리 사발과 사정이 비슷하다.
안에 담기는 건 어떤 와인인가
쿤카에 어울리는 건 비싼 병 와인이 아니다. 동네에서 담가 그해 가을에 바로 마시는 햇와인, 갈리시아 사람들이 비뇨 도 파이스라고 부르는 술이다. 예전 선술집은 안쪽에 통을 두고, 거기서 샤라(xarra)라고 부르는 흰 도자기 주전자에 받아 식탁에 내놓았다. 주전자가 비면 또 채워 왔다.
레드 쪽에서 가장 유명한 건 틴토 데 바란테스(Tinto de Barrantes)일 것이다. 리아스 바이사스의 리바두미아 마을에서 나오는 와인인데, 도수가 10도가 안 되고 산도가 높다. 젖산 발효를 거치지 않은 채 마시기 때문에 오래 두거나 멀리 옮기기가 어렵다. 그래서 갈리시아 밖에서는 보기 힘들다. 색은 블랙커런트처럼 짙은 보랏빛이다. 전통적으로 쿤카에 따라 마시고, 매년 5월 리바두미아에서 이 와인 축제가 열린다.

이런 와인을 크리스털 잔에 따르고 빙빙 돌려 가며 향을 맡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마시라고 만든 술이 아니다. 차갑고, 시큼하고, 탄산기가 살짝 도는 경우도 있고, 문어 요리나 칼도 옆에서 벌컥벌컥 마신다. 쿤카는 그 방식에 딱 맞는 그릇이다.
왜 하필 흰 사발인가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모른다. 쿤카를 다룬 글들은 거의 다 "기원은 사실상 알려져 있지 않다"로 시작한다. 그래도 전해 오는 설명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햇와인이 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걸러 내지 않은 새 와인에는 찌꺼기가 떠 있다. 유리잔에 따르면 그게 다 보이는데, 불투명한 도자기에서는 잘 안 보인다. 갈리시아의 음식사 연구자 사비에르 카스트로가 소개한 오 모라소 지역 이야기가 이 설명과 잘 맞는다. 거기서는 11월부터 나오는 새 와인은 도자기 잔에 마시고, 3월쯤 와인이 가라앉아 맑아지면 카롤리노(carolino)라는 유리잔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런데 흰 사발이 오히려 색을 잘 보여 준다는 반대 방향의 설명도 있다. 바란테스 같은 보랏빛 와인은 흰 바닥에서 색이 훨씬 선명하게 산다. 찌꺼기는 감추고 색은 드러낸다니 모순 같지만, 둘 다 맞을 수 있다. 사발 바닥이 얕으니 짙은 색은 테두리에서 번지듯 보이고, 가라앉은 앙금은 그 밑에 묻힌다.
하나 더 있다. 리베이로 와인에 휘발성 에테르가 많아 두통을 일으켰는데, 입구가 넓은 쿤카에서는 그게 날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이건 그럴듯한 민간 설명 정도로 들어 두는 게 좋겠다. 확인된 얘기는 아니다.
내 생각엔 가장 단순한 답이 제일 가까울 것 같다. 유리는 비쌌고, 도기는 집에 있었다. 칼도를 마시던 사발에 와인도 따랐다. 흰색이 된 건 도기가 좋아지면서 유약을 입히게 된 뒤의 일이다. 초기의 흙 쿤카는 방수를 위해 역청을 발랐다고 하니, 처음부터 하얗지는 않았다.
가난한 집 쿤카, 부잣집 쿤카
같은 쿤카라도 흙과 유약에 따라 급이 갈렸다. 갈리시아 쪽 자료에서는 대개 셋으로 나눈다.
가장 흔한 건 갈색 흙으로 빚어 안쪽에만 유약을 바른 것. '가난한 집 쿤카'라고 불렀다. 그 위가 쿤켈로(cunquelo)다. 흰 흙으로 매끈하게 빚고 겉에 단순한 꽃무늬를 그렸지만, 유약은 여전히 안쪽에만 입혔다. 가장 좋은 건 에스쿠디야(escudilla)라고 해서, 흰 흙에 테두리 아래로 음각 장식을 넣고 안팎을 다 유약으로 덮었다.
지금 우리가 떠올리는 매끈한 흰 쿤카는 사실 부잣집 쪽 모양이 대중화된 것이다.

크기도 달랐다. 큰 쿤카는 쿤콘(cuncón)이라고 해서 4분의 1리터쯤 들어갔다. 이건 혼자 마시는 잔이 아니었다. 밭일을 하다가 쉬는 참에 한 사발을 채워 여럿이 돌렸다. 폰테 우야 지역에서는 씻지도 않고 다음 사람에게 넘겼다고 한다. 찝찝한 사람은 와인으로 한 번 헹구면 그만이었다. 스페인어로 이런 속담까지 있었다. "모두의 잔은 잘 핥이고 잘 안 씻긴다."
한동안 촌스러운 물건이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쿤카는 계층을 가리지 않았다. 농부도 썼고, 산티아고의 지식인들도 카페에 모여 쿤카로 마셨다. 사정이 바뀐 건 20세기 후반이다. 좋은 와인은 크리스털 잔에 마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오고, 갈리시아 와인도 병에 담아 멀리 파는 술이 되면서 쿤카는 시골 선술집 물건으로 밀려났다.
요즘은 거꾸로 되살리려는 쪽이다. 리베이로 지역에서는 2000년 가을 산 마르틴 축일에 맞춰 도자기 잔으로 햇와인을 마시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리베이로 사람들 중엔 도자기 잔이 새 와인을 맛보기에 제일 낫다고 고집하는 사람도 있다. 아 코루냐에는 쿤카로 와인 마시는 문화를 지키겠다는 모임까지 있다. 그래도 관광객이 많은 가게에서는 그냥 유리잔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쿤카로 마시고 싶으면 따로 부탁하는 편이 확실하다.
국경 너머의 말가
갈리시아 바로 아래, 포르투갈 북부 미뉴 지방에도 같은 그릇이 있다. 여기서는 말가(malga)나 티젤라(tigela)라고 부르고, 레드 비뉴 베르드를 담아 마신다. 비뉴 베르드라고 하면 보통 가볍고 톡 쏘는 화이트를 떠올리지만, 미뉴 사람들에게는 진한 보랏빛 레드 쪽이 오래된 술이다. 그리고 그 레드는 여전히 흰 말가에 마시는 게 제맛이라고들 한다.

말가도 처음엔 흙으로 빚었고, 도기가 서민에게 퍼지면서 흰 유약을 입었다. 자기 말가는 잘사는 집이나 쓰던 것이었다. 갈리시아와 순서가 똑같다. 원래 갈리시아와 미뉴는 말도 가깝고 포도도 비슷한 걸 키우는 한 동네였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몇 해 전에는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루 시자가 한 와이너리의 부탁으로 이 말가를 새로 디자인하기도 했다.
쿤카에 대단한 과학이 숨어 있는 건 아니다. 향을 모아 주지도 않고, 온도를 지켜 주지도 않는다. 와인 잔이 따지는 것들을 쿤카는 대부분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한 손에 쏙 들어오고, 넘어질 일이 없고, 떨어뜨려도 잘 안 깨지고, 따르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다.
갈리시아에 갈 일이 있으면 선술집에서 비뇨 도 파이스 틴토를 쿤카로 달라고 해 보시길. 잔을 돌리지는 말고, 그냥 손바닥에 올려 마시면 된다. 다 마시고 사발 바닥에 남은 보랏빛 테를 보면, 이 술을 왜 유리잔이 아닌 데 따랐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쿤카의 크기·재료·리베이로와의 관계 — Wikipedia (es) "Cunca", Albariño.com "La cunca gallega" · 오 모라소의 계절별 잔 구분, 쿤콘, 폰테 우야의 돌려 마시기, 2000년 리베이로 캠페인 — Xavier Castro, "La taza y la cunca", Diario de Pontevedra · 쿤카의 세 등급 — A la gallega, "La cunca: acariciar el vino" · 틴토 데 바란테스 — Wikipedia (en) "Tinto de Barrantes" · 미뉴의 말가 — Blogue do Minho, Revista de Vinhos "Siza reinventa a malga de vinh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