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박물관에 가면 꼭 한 번은 마주치는 청동 그릇이 있다. 다리 세 개가 가늘게 뻗어 있고, 한쪽으로 긴 주둥이가, 반대쪽으로 뾰족한 꼬리가 나 있다. 옆구리엔 손잡이. 그리고 주둥이가 시작되는 테두리 위에 작은 기둥 두 개가 버섯처럼 솟아 있다.

이게 작(爵)이다. 중국어로는 '쥐에(jué)'라고 읽는다.

얼리터우 하도유지박물관에 전시된 유정문 청동 작을 손잡이 쪽에서 본 모습. 양옆으로 길게 뻗은 주둥이와 꼬리, 가늘고 긴 세 다리
1975년 허난성 옌스 얼리터우 유적에서 나온 유정문(乳釘紋) 청동 작. 높이 22.5센티미터.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청동 작으로 꼽힌다. 주둥이가 시작되는 테두리에 버섯 모양의 작은 돌기가 하나 솟아 있다. 나중에 커질 기둥의 초기 모습이다. 이름의 유래인 젖꼭지 모양 돌기 다섯 개는 몸통 다른 쪽 면에 있어 손잡이 쪽에서 찍은 이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 Yumeto, CC BY-SA 4.0)

이 잔에는 꼭 따라붙는 이야기가 있다. 저 두 기둥이 술을 절제하라는 장치라는 것이다. 작에 입을 대고 끝까지 들이켜려고 고개를 젖히면 기둥이 얼굴에 걸린다. 콧등이든, 눈썹이든, 눈이든. 그러니 한 번에 다 마시지 말고 조금씩 마시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럴듯하다. 그리고 꽤 오래된 설명이기도 하다. 다만 진짜인지는 따로 따져 봐야 한다.

눈썹에 걸린다는 말은 청나라 때 나왔다

이 해석을 글로 분명하게 남긴 사람 중 하나가 청나라 학자 단옥재(段玉裁)다. 18세기 말에 『설문해자』에 주석을 달면서 爵 글자 밑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 남아 있는 옛 작으로 확인해 보면, 두 기둥이 눈썹에 닿을 때 술이 다 비워진다. … 고개를 젖히지 않고도 다 비울 수 있으니, 두 기둥이 눈썹에 닿는 데서 절도를 취한 것이다."

눈을 찌른다기보다 눈썹에 닿는다는 얘기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 건 예법에 맞지 않으니, 기둥이 눈썹에 닿는 각도까지만 기울이면 딱 맞게 다 마실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는 것이다. 과음 경고라기보다는 점잖게 마시는 자세에 관한 설명에 가깝다. 이게 전해지면서 "기둥이 얼굴을 막는다", "눈을 찌른다"로 조금씩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절제 이야기는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2세기 초에 나온 『설문해자』 본문은 작을 이렇게 풀었다.

"작은 예기(禮器)다. 참새 모양을 본떴다. … 그릇을 참새 모양으로 만든 것은 그 울음소리 '절절족족(節節足足)'을 취한 것이다."

작(爵)과 참새 작(雀)은 우리 한자음으로도 같고, 옛 문헌에서는 서로 바꿔 쓰기도 했다. 참새가 '지에지에 쭈쭈' 하고 우는 소리를 '절제하라, 만족하라(節節足足)'로 알아들었다는 말장난이다. 한나라 사람들도 이미 이 그릇에서 절도를 읽어 냈던 셈이다. 그런데 이 해석이 나왔을 때 청동 작은 이미 천 년 넘게 아무도 쓰지 않는 물건이었다.

마시는 잔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작이 입을 대고 마시는 잔이었는지부터가 논란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주둥이가 길고 좁다. 입술을 대면 술이 그 홈을 따라 흘러들어 오긴 하겠지만, 편하지는 않다. 몸통 옆에 손잡이가 있어서 들고 기울이면 주둥이 쪽이 앞을 향한다. 마시는 것보다는 따르는 데 맞는 모양이다.

다리도 이상하다. 술잔에 다리 세 개가 왜 필요할까. 그것도 저렇게 길고 바깥으로 벌어진 다리가. 답은 바닥에 남아 있다. 허난성 정저우의 상나라 유적에서 나온 작들은 바닥에 그을음이 앉아 있었다. 불 위에 올렸다는 뜻이다. 얼리터우의 초기 작 중에는 바닥 쪽에 연기가 빠지는 구멍을 낸 것도 있다. 작은 술을 데우는 그릇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작을 술을 데우고 따르는 의례용 그릇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제사 때 술을 데워 신에게 바치거나 땅에 붓는 데 썼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쑨지(孫機)는 작이 '마시는 그릇'이라는 생각 자체가 후대에 굳어진 것이라고 봤다. 데운 청동 그릇에 바로 입을 대는 것도 상상하기 쉽지 않다.

상나라 후기 청동 작을 옆에서 본 모습. 주둥이 위 테두리에 버섯 모양 머리를 단 기둥 두 개가 높이 솟아 있다
상나라 후기 안양 시기의 작(기원전 1300~1050년경, 높이 18.4센티미터). 기둥이 길게 자라 위에 버섯 모양 머리를 얹었다. 소장처인 LACMA는 이 유물에 '작은 의례용 술 데우개(Wine Warmer)'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다 (사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퍼블릭 도메인)

그럼 기둥은 뭐였나

모른다. 이게 솔직한 답이다. 대신 몇 가지 설이 있다.

들어 올리는 손잡이. 불 위에서 데운 작은 뜨겁다. 손잡이를 맨손으로 잡기 어려우니, 기둥에 막대기나 집게를 걸어 들어 올렸다는 설명이다. 연구자 자훙보(賈洪波)는 작이 술 데우는 데 많이 쓰일수록 기둥이 점점 높고 쓸모 있는 모양으로 바뀌었다고 봤다. 끈을 걸어 매달았다는 비슷한 설도 있다.

거름망 걸이. 상하이박물관장을 지낸 청동기 전문가 마청위안(馬承源)의 설이다. 그 시절 술은 지금 같은 맑은 술이 아니라 곡물 찌꺼기가 둥둥 뜨는 탁주였다. 기둥에 거름천을 걸쳐 놓고 술을 부으면 찌꺼기가 걸러진다는 것이다.

그냥 장식. 반론도 만만찮다. 기둥이 그릇 무게중심과 상관없는 자리에 있는 경우가 많고, 집게로 들기엔 너무 작은 것도 있다. 귀족이 마실 술이라면 미리 걸러 두었을 텐데 굳이 잔에서 거를 이유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기능 없이 모양을 위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셋 다 확정은 아니지만, 절제설보다는 발 디딜 데가 있다. 절제설은 작을 직접 입에 대고 마셨다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하는데, 그 전제부터 흔들리고 있으니까. 게다가 상나라는 술에 관대하기로 유명하다. 뒤를 이은 주나라는 상나라가 술 때문에 망했다고 아예 금주령 문서(『상서』 주고酒誥)를 남겼을 정도다. 그런 상나라 사람들이 굳이 과음 방지 장치를 술잔에 달았다는 이야기는 조금 어색하다.

이름도 나중에 붙었다

또 하나. 이 그릇이 원래 '작'이라 불렸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지금 우리가 쓰는 청동기 이름 대부분은 송나라 학자들이 붙인 것이다. 11세기에 땅에서 나온 옛 청동기를 모아 연구하는 금석학(金石學)이 유행했는데, 여대림(呂大臨)의 『고고도(考古圖)』 같은 책에서 경전에 나오는 그릇 이름을 실물에 하나씩 맞춰 나갔다. 경전에 '작'이라는 술 그릇이 있고, 『설문해자』가 참새 모양이라 했으니, 주둥이와 꼬리가 새처럼 생긴 이 그릇이 작이 됐다.

다행히 맞혔을 가능성이 크다. 갑골문의 爵 자가 기둥 달린 이 그릇 모양 그대로이고, 서주 시대 노후작(魯侯爵)에는 "노후가 작을 만들었다(魯侯作爵)"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래도 이름을 붙인 건 송나라 학자들이었다. 그들이 이 그릇을 처음 들여다봤을 때는 이미 실제로 쓰던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파란 유약에 흰 용무늬를 넣은 명나라 자기 작. 다리 셋과 기둥은 남았지만 주둥이와 꼬리가 짧아지고 몸통이 둥근 잔 모양이다
명나라 가정 연간(1522~1566)에 징더전에서 구운 자기 작. 제사 때 술을 올리는 데 쓰였다. 송나라 이후 옛 그림책을 보고 재현하면서 작은 이렇게 잔 모양에 가까워졌다. 기둥은 하나로 줄었다. 대영박물관 소장 (사진: Marie-Lan Nguyen, CC BY 2.5)

3,700년 전에 시작해 서주 말에 사라지다

청동 작이 처음 나타난 곳은 허난성 뤄양 근처의 얼리터우 유적이다. 기원전 1700년 전후, 중국 최초의 왕조로 거론되는 하(夏)나라의 도읍으로 보는 곳이다. 위 사진의 유정문 작이 여기서 나왔다.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청동 그릇 가운데 하나다. 중국 땅에서 처음 청동으로 만든 그릇들 가운데 술 데우는 그릇이 있었던 셈이다.

상나라 때 작은 전성기를 맞는다. 상나라 왕 무정(武丁)의 왕비이자 장군이었던 부호(婦好)의 무덤에서는 작이 40점, 짝을 이루는 술잔 고(觚)가 53점 나왔다. 작과 고는 한 쌍으로 무덤에 넣는 기본 세트였다.

붉은 진열장 안에 나팔 모양의 청동 고 두 점과 기둥 달린 청동 작 두 점이 번갈아 놓여 있다
은허박물관의 상나라 고와 작. 나팔처럼 벌어진 고와 다리 셋 달린 작이 짝을 이뤄 놓여 있다 (사진: Gary Todd, CC0)

그러다 서주 후기로 넘어가면서 작은 사라진다. 술을 경계한 주나라의 분위기 탓인지, 제사 방식이 바뀐 탓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한나라 사람들은 술을 귀 달린 납작한 잔인 이배(耳杯)로 마셨고, 다리 셋 달린 청동 작은 땅속에만 남았다.

술잔이 벼슬 이름이 되다

작이 남긴 가장 오래가는 흔적은 그릇이 아니라 낱말이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귀족 등급을 부르는 이 말들의 '작'이 바로 이 술 그릇 爵이다. 『예기』에 "종묘 제사에서 귀한 사람은 작으로 술을 올리고, 천한 사람은 산(散)으로 올린다"는 구절이 있다. 제사에서 어떤 그릇을 드느냐가 그 사람의 서열이었다. 그래서 그릇 이름이 그대로 신분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유럽 귀족 작위를 번역할 때도 이 체계를 빌려 왔다. 영국의 듀크가 공작, 백작은 카운트나 얼이 되었다. 지금도 영국 드라마 자막에 백작 부인이 나오면, 그 '작'은 3,700년 전 얼리터우의 술 데우는 그릇에서 온 글자다.

절제의 잔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 잔을 누가 드느냐가 중요했다는 것이다. 술을 얼마나 마시느냐보다.

가득 채우면 술이 빠져나가는 잔이 정말로 절제를 위해 만들어진 경우는 따로 있다. 조선의 계영배가 그렇다. 중국의 오늘날 술잔이 궁금하다면 마오타이잔 글도 함께 보면 좋다.

許愼, 『說文解字』 爵部 · 段玉裁, 『說文解字注』 · 呂大臨, 『考古圖』, 1092 · 孫機, 「爵未必就是“饮酒器”——作为礼器的爵及其历史演变」 · 『禮記』 禮器 · 『尚書』 酒誥 · 中國社會科學院考古研究所, 『殷墟婦好墓』, 1980

— 조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