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 41번 전시실에 높이 16센티미터쯤 되는 유리잔이 하나 있다. 진열장 조명을 앞에서 비추면 탁한 올리브색이다. 오래된 옥이나 굳은 기름 같은 색. 그런데 잔 안쪽에서 불을 켜면 전체가 붉게 달아오른다. 포도주를 가득 따라 놓은 것처럼.
잔은 하나다. 칠을 한 것도, 색유리 두 겹을 붙인 것도 아니다. 같은 유리가 빛이 어느 쪽에서 오느냐에 따라 다른 색을 낸다.

이 잔의 이름은 리쿠르구스 컵(Lycurgus Cup)이다. 4세기 로마에서 만들어졌다. 이런 색 변화가 왜 생기는지는 1990년에야 제대로 밝혀졌다.
처음엔 유리인지도 몰랐다
1950년에 로스차일드 경의 부탁으로 고고학자 도널드 하든과 조슬린 토인비가 이 잔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먼저 부딪힌 문제는 재질이었다. 이게 정말 유리가 맞느냐는 것이다.
당시 알려진 고대 유리 기술로는 이런 색이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옥이나 오팔을 깎은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자연사박물관 광물학부 책임자였던 클래링불이 들여다보고 유리라고 판정했고, 1959년 X선 회절 분석으로 확정됐다. 돌이 아니라 유리였다. 문제는 그 뒤였다. 유리라면, 대체 뭘 넣은 유리길래 이러나.
반사광에서는 녹색이 섞인 불투명한 노란빛, 투과광에서는 반투명한 루비색. 이렇게 보는 방향에 따라 색이 갈리는 성질을 이색성(dichroism)이라고 부른다. 리쿠르구스 컵 말고도 이런 로마 유리 조각이 몇 점 더 있지만, 온전한 형태로 남은 그릇은 이것 하나다.

잔에 새겨진 건 한 남자가 죽는 장면이다
색에 가려 덜 이야기되지만, 잔 겉면의 조각도 예사롭지 않다. 인물들이 잔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공중에 떠 있다. 몸통과는 작은 유리 다리 몇 개로만 이어져 있다.
장면은 트라키아 에도니아족의 왕 리쿠르구스가 최후를 맞는 순간이다. 이 왕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6권에 처음 나온다.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여인들을 소몰이 막대로 내쫓다가 신들의 벌을 받는 왕으로. 잔에 새겨진 건 후대에 살이 붙은 판본이다. 성미 사나운 왕이 디오니소스의 시녀 암브로시아에게 달려들자, 그녀가 대지의 여신에게 빌어 포도 덩굴로 변한다. 그리고 덩굴이 된 몸으로 왕을 휘감아 꼼짝 못 하게 묶어 버린다.
잔을 한 바퀴 돌려 보면 이야기가 이어진다. 덩굴에 감겨 몸부림치는 리쿠르구스, 몸을 웅크린 암브로시아, 돌을 던지려고 팔을 치켜든 사티로스, 판, 그리고 한 팔을 뻗어 왕을 가리키는 디오니소스와 그 발치의 표범. 디오니소스는 끝에 솔방울이 달린 지팡이 티르소스를 들고 있다.

술의 신이 자기를 모욕한 왕을 포도 덩굴로 옭아매는 이야기다. 술잔에 새기기에 이만큼 어울리는 장면도 드물다.
정치적인 해석도 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공동 황제였던 리키니우스를 무너뜨린 사건을 빗댔다는 것이다. 리키니우스는 이듬해 처형됐다. 디오니소스가 콘스탄티누스, 벌받는 왕이 리키니우스라는 해석인데, 그럴듯하긴 해도 증거가 있는 건 아니다.
두께 1.5센티미터 덩어리를 깎아서
이렇게 인물이 몸통에서 떨어져 떠 있는 로마 유리를 케이지 컵(cage cup), 라틴어로 디아트레타(diatreta)라고 부른다. 대부분 3세기 중반에서 4세기 사이에 만들어졌고, 제국 전역에서 나왔지만 남은 건 조각까지 합쳐 50~100점 정도다. 대개는 둥근 고리를 격자로 엮은 기하학 무늬다. 인물이 들어간 건 몇 점 되지 않고, 리쿠르구스 컵만큼 정교하게 남은 건 없다.
만드는 방법은 오래 논쟁거리였다.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이렇다. 두꺼운 유리 덩어리로 컵 모양의 원재료를 먼저 만들고, 그걸 바깥에서부터 갈고 깎아 내면서 무늬만 남기는 방식이다. 1960년대에 코닝 유리공장이 이 잔과 같은 성분으로 원재료를 재현해 봤는데, 벽 두께가 15밀리미터쯤은 돼야 했다. 그 두꺼운 벽을 깎아 내면서 무늬 뒤쪽까지 파고들어 잔 벽과 인물 사이에 틈을 만든 것이다. 한 번만 삐끗해도 끝이다.
1950년대에 잔 받침을 떼어 냈을 때 안에서 원래 유리 파편 몇 개가 나왔다. 2007년에 대영박물관 연구팀이 그중 덩굴 줄기 조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봤다. 옆면에는 초승달 모양의 깎인 자국이 남아 있었다. 회전하는 바퀴로 갈아 낸 흔적이다. 앞뒷면에는 줄과 연마재로 문지른 결이 있었다. 한때 불로 녹여 광을 냈다고 여겨졌던 매끈한 표면도 알고 보니 기계적으로 연마한 것이었다. 가는 평행선 긁힘이 무리 지어 남아 있었다. 유리를 부드러울 때 틀에 눌러 찍었다는 반론(독일의 로제마리 리르케가 제기한)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 파편은 깎아 낸 쪽을 가리켰다.
로마에서는 유리를 만드는 사람(비트레아리이)과 깎는 사람(디아트레타리이)이 따로였다고 본다. 리쿠르구스 컵을 깎은 사람은 보석 세공에 가까운 기술을 가진 장인이었을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색을 다룬 방식이다. 인물들 뒤편, 잔 안쪽 벽이 인물 모양대로 오목하게 파여 있다. 인물이 붙어 있는 부분은 유리가 두 겹이라 빛이 덜 통하니, 안쪽을 파내서 두께를 맞춘 것이다. 그래야 빛을 비췄을 때 인물과 배경이 고르게 붉어진다. 그리고 리쿠르구스의 몸은 원재료 중에서도 색이 살짝 다른 부분에서 깎아 냈다. 투과광에서는 더 보랏빛이 돌고, 반사광에서는 더 노랗다. 주인공만 다른 색으로 보이게 자리를 골랐다는 얘기다.
금은 거의 들어 있지 않다
1959년, 대영박물관은 이 잔의 파편을 영국 제너럴 일렉트릭(GEC) 연구소로 보냈다. 분석해 보니 기본은 평범한 로마 유리였다. 모래와 소다, 석회로 만드는 소다석회유리. 지금의 창유리나 병 유리와 같은 계열이다. 다만 마지막 1% 남짓한 미량 원소 안에 금과 은이 들어 있었다.
1962년부터는 미국 코닝 유리 박물관의 로버트 브릴이 붙었다. 브릴은 직접 유리를 녹여 실험하면서 이색성이 금 약 40ppm, 은 약 300ppm과 관련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40ppm이면 유리 1킬로그램에 금이 0.04그램이다. 반지 하나 녹여도 이런 잔 수백 개를 물들일 양이다.
하지만 브릴은 결정적인 증거, 유리 속의 금속 알갱이를 직접 보여 주지 못했다. 당시 장비로는 안 보였다. 1980년대 후반에 영국의 데이비드 바버와 이언 프리스톤이 투과전자현미경으로 다시 들여다보고서야 그 알갱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결과는 1990년 학술지 『아키오메트리(Archaeometry)』에 실렸다.
- 크기는 대체로 50~100나노미터. 머리카락 굵기의 천분의 일쯤이다.
- 성분은 은과 금이 약 7 대 3으로 섞인 합금이고, 구리가 10% 정도 더 들어 있다.
이 크기가 핵심이다. 금속 덩어리는 우리가 아는 금색, 은색으로 반짝인다. 그런데 빛의 파장보다 작은 알갱이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알갱이 표면의 전자들이 특정 파장의 빛에 맞춰 한꺼번에 출렁인다(표면 플라스몬 공명). 그 결과 금·은 알갱이들은 초록 계열의 빛을 흡수하거나 옆으로 흩어 버리고, 붉은 빛은 통과시킨다. 그래서 앞에서 보면 흩어져 되돌아오는 탁한 녹색이, 뒤에서 빛을 통과시키면 붉은색이 보인다. 알갱이 크기와 금·은 비율이 조금만 달라져도 색이 바뀐다.
알갱이 말고 또 하나가 보였다. 15~100나노미터짜리 소금(염화나트륨) 결정이다. 유리를 만들 때 알칼리 재료로 쓴 광물염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소금 결정 자체는 색을 내지 않지만, 할로겐이 금 발색을 돕는다는 연구가 있어서 간접적으로 한몫했을 수도 있다. 유리에 0.3% 정도 들어 있는 안티몬도 녹아 있던 금과 은을 금속 알갱이로 되돌리는 데 관여했을 것으로 본다.
로마인들은 알고 만들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는.
프리스톤의 설명을 따르면, 로마 시대에 금과 은으로 유리를 물들이는 건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그만인" 일에 가까웠다. 금과 은의 농도, 유리 안에 퍼진 상태, 가열 온도와 시간, 가마 안 분위기까지 전부 맞아떨어져야 이 색이 나온다. 남아 있는 다른 이색성 로마 유리들을 보면 금과 은의 비율이 제각각이다. 대영박물관의 다른 케이지 컵 파편은 은이 2,270ppm인데 금은 13ppm뿐이고, 색도 표면은 우윳빛 황갈색, 투과광은 맑은 갈색이다. 리쿠르구스 컵만큼 극적이지 않다. 그리고 리쿠르구스 컵의 원재료조차 색이 고르지 않았다. 앞에서 말한 리쿠르구스 몸통의 다른 색이 그 증거다.
로마 장인들은 금이 핵심이라는 것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유리들은 대부분 금보다 은이 훨씬 많다. 금은 은과 섞인 천연 합금(엘렉트룸) 형태로 들어갔을 수 있다. 어떻게 처음 발견했는지에 대해서는 금속을 제련하고 남은 찌꺼기를 유리 착색제로 사다 썼다가 우연히 나왔다는 추측, 금박 장식 유리를 만들다 사고로 나왔다는 추측이 있다. 유리 속 구리와 납 함량이 높은 것도 찌꺼기설과 잘 맞는다.
확실한 건 이 기술이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4세기를 넘긴 흔적이 없다. 중세 성당의 붉은 스테인드글라스를 금으로 물들였다는 이야기가 가끔 돌지만, 지금까지 분석된 건 전부 구리였다. 금으로 붉은 유리를 꾸준히 만들 수 있게 된 건 17세기, 흔히 독일의 유리 화학자 요한 쿤켈의 공으로 돌린다. 로마인이 우연히 손에 넣었다 놓친 걸 유럽이 다시 찾기까지 천삼백 년쯤 걸린 셈이다.

그리고 이 붉은색이 왜 생기는지를 처음 제대로 짚은 건 1857년의 마이클 패러데이였다. 금을 아주 잘게 쪼개 물에 퍼뜨리면 루비색 액체가 된다는 걸 보이고, 그 색이 금 알갱이 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리쿠르구스 컵이 1,500년 동안 품고 있던 답이 거기 있었다. 다만 그 답을 잔 속에서 직접 확인하기까지는 다시 130여 년이 걸렸다.
황제가 보냈다는 색이 변하는 잔
로마 사람들이 이런 잔을 어떻게 여겼는지 짐작하게 하는 기록이 있다. 로마 황제 전기 모음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매부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실려 있다.
"신전의 사제에게서 받은, 색이 바뀌는 여러 빛깔의 잔을 보내네. 자네와 내 누이에게 특별히 바치는 것이니, 축일 연회에서 써 주게."
원문에서 이 잔은 '칼리케스 알라손테스(calices allassontes)'라 불린다. 알라손테스는 '바뀐다'는 뜻의 그리스어를 라틴 글자로 옮긴 말이다. 하드리아누스는 2세기 사람이고, 이 편지는 거의 확실히 후대에 지어낸 것이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자체가 가짜 문서와 지어낸 인물이 수두룩하기로 악명 높은 책이다. 그래도 쓸모가 있다. 책이 쓰인 4세기 무렵에 저자가 색이 변하는 잔을 알고 있었고, 그게 황제가 가족에게 줄 만한 귀한 선물이며, 축일 잔칫상에 오르는 물건이었다는 것만큼은 보여 준다.
코닝 유리 박물관장을 지낸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는 건 설익은 포도가 익어 가는 모습이고, 그래서 이 잔은 디오니소스 축제용으로 만든 게 아니냐는 것이다. 포도 덩굴, 술의 신, 포도처럼 익어 가는 색. 셋이 한 잔에 모여 있다는 건 우연치고는 너무 잘 맞는다.
다른 케이지 컵들은 건배를 새겼다
리쿠르구스 컵이 신화를 새겼다면, 다른 케이지 컵들은 대개 글자를 새겼다. 격자무늬 위쪽 테두리에 유리 글자가 둘러 떠 있다.

밀라노의 트리불치오 컵에는 BIBE VIVAS MULTIS ANNIS("마시게, 오래 살게"), 쾰른 컵에는 그리스어로 "마시게, 늘 잘 살게"가 새겨져 있다. 전부 잔을 권하는 말이다. 잔을 부딪치며 건강을 비는 인사가 로마에서는 아예 잔에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모든 케이지 컵이 술잔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넓은 사발 모양은 기름 등잔으로 매달아 썼다는 해석이 있고, 실제로 코닝 박물관의 것에는 매달던 구리 부속이 남아 있었다. 반면 글자가 새겨진 컵 모양은 잔치에서 돌려 마시던 잔으로 본다. 어느 쪽이든 매일 쓰는 그릇은 아니었다. 2004년에 사발형 케이지 컵 하나가 경매에서 약 265만 파운드에 팔렸다.
1845년 이전은 아무도 모른다
리쿠르구스 컵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른다. 누가 어디서 파냈는지 기록이 없다. 인쇄물에 처음 등장하는 건 1845년, 한 프랑스 작가가 "몇 해 전 뒤부아 씨의 손에서 봤다"고 적은 것이다. 1857년쯤엔 런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라이오넬 드 로스차일드가 갖고 있었고, 1862년에 사우스켄싱턴 박물관(지금의 V&A) 대여 전시에 나왔다. 그 뒤로 거의 백 년 동안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고에 있었다.

잔 위아래를 감싼 금도금 은 장식도 원래 것이 아니다. 18세기나 19세기에 누군가 붙였다. 원래 잔에는 투각 장식 받침이 있었을 것이고, 테두리도 지금보다 높았을 수 있다. 어느 시점에 깨졌고, 그 자리를 금속으로 덮은 것이다. 앞에서 말한 공구 흔적 연구에 쓰인 파편이 이때 받침 안에서 나온 것이다. 받침은 1973년에 다시 붙였다.
1958년, 빅터 로스차일드 경이 이 잔을 대영박물관에 2만 파운드에 넘겼다. 그중 2,000파운드는 미술품 기금(지금의 아트 펀드)이 보탰다. 지금 박물관 소장번호는 1958,1202.1이다.
그리고 센서 연구실로
2013년, 미국 일리노이대의 로건 류 연구팀이 리쿠르구스 컵에서 이름을 딴 장치를 발표했다. 플라스틱 판에 아주 작은 컵 모양 구조를 수없이 찍어 내고 금과 은을 입혔다. 이른바 '나노 리쿠르구스 컵 배열'이다. 이 판 위에 물, 기름, 알코올 같은 액체를 올리면 액체마다 판의 색이 다르게 보였다. 분광기 없이 눈이나 평범한 사진기로 액체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 방식이 기존 나노 플라스몬 소자보다 약 100배 민감하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은 원래의 리쿠르구스 컵도 담긴 액체에 따라 빛깔이 달라졌을 거라고 추측했다. 잔 안에 무엇이 담겼느냐에 따라 빛이 꺾이는 정도가 달라지고, 그러면 알갱이들이 반응하는 빛도 달라진다는 원리다. 물을 따를 때와 포도주를 따를 때 잔의 색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확인해 볼 방법은 없다. 대영박물관이 이 잔에 뭘 따라 보게 해 줄 리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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