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잔 이름은 대개 생김새나 쓰임에서 온다. 와인잔, 맥주잔, 샷글라스처럼. 그런데 '텀블러(tumbler)'는 좀 이상하다. 굴러 넘어진다는 뜻의 tumble에서 왔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텀블러라 부르는 잔은 바닥이 두껍고 평평해서 어지간해선 안 넘어진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정반대다. 왜 이렇게 됐을까.
세울 수 없던 잔
이야기는 17세기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의 tumbler는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했다고 전해진다. 탁자에 내려놓으면 그대로 기우뚱, 넘어졌다. 세울 수가 없으니 잔을 받은 사람은 별수 없이 끝까지 손에 들고 있어야 했다. 결국 한 번에 비우고 나서야 잔을 넘기거나 엎어둘 수 있었다.
왜 굳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여기엔 두 갈래 이야기가 붙는다.
하나는 단순하다. 다 마시기 전엔 못 내려놓게 하려는 잔. 술자리에서 잔을 슬쩍 내려놓고 발을 빼는 걸 허락하지 않는, 말하자면 강권의 도구였다는 설명이다.
다른 하나는 정반대다. 바닥에 무게를 실어, 어떻게 기울여도 오뚝이처럼 제자리로 돌아오게 만든 잔도 tumbler라 불렸다. 흔들리는 배 위나 마차 안에서도 술이 쏟아지지 않게. 넘어뜨리려는 잔과, 절대 안 넘어지려는 잔이 같은 이름을 쓴 셈이다.

바닥이 둥글거나 뾰족해 탁자에 세울 수 없던 옛 잔. 손에서 놓는 순간 넘어졌기에 '텀블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두 갈래가 서로 어긋나 보여도 뿌리는 하나다. tumble에는 '넘어지다'와 '재주넘다'가 함께 들어 있다. 곡예사를 tumbler라 부르고, 넘어뜨려도 벌떡 일어나는 오뚝이 인형도 tumbler다. 넘어짐을 두고 만든 물건이라는 점에서, 잔도 그 식구였다.
이름만 남는 동안
1660년대쯤이면 tumbler는 이미 '술잔'을 뜻하는 단어로 자리를 잡는다. 그 뒤로 잔은 조용히 변했다. 유리 다루는 솜씨가 좋아지고, 탁자에 세워두고 마시는 일이 당연해지면서 바닥은 점점 평평하고 두꺼워졌다. 굴러 넘어지던 성질은 필요가 없어졌다.
사라진 건 특징이었고, 남은 건 이름이었다. 우리가 물려받은 건 넘어지지 않는 잔에 붙은, 넘어진다는 뜻의 이름이다.
지금의 텀블러

두껍고 평평한 바닥. 오늘날 텀블러를 텀블러로 만드는 건 이 안정감이다. 원래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다.
오늘날 텀블러는 다리도, 손잡이도, 굽도 없는 원통형 잔을 통칭한다. 위스키를 얼음과 함께 마시는 올드패션드(록스) 잔, 키 큰 하이볼 잔, 더 길쭉한 콜린스 잔, 그냥 물잔까지 다 텀블러다. 모양과 높이는 제각각이지만 공통점은 딱 하나 — 두껍고 평평한 바닥이다.
위스키를 온더록으로 즐길 때 텀블러가 어울리는 것도 이 바닥 덕이다. 얼음을 넣고 휘저어도 흔들리지 않고, 두꺼운 유리가 손안에 묵직하게 잡힌다. 향을 좁게 모으는 글렌케언이나 스니프터와 달리, 텀블러는 향보다 편함을 택한 잔이다. 오래 앉아 홀짝이기에 좋은.
이름과 물건이 뒤집힐 때
재미있는 건, 텀블러가 지금의 텀블러가 되는 동안 자기 이름을 정확히 배신했다는 점이다. 넘어지라고 만든 잔이, 절대 안 넘어지는 잔의 이름표가 됐다.
말이 물건보다 오래 사는 일은 종종 있다. 손잡이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우리는 여전히 전화를 '건다'고 하고, 필름이 없는데도 사진을 '찍는다'고 한다. 텀블러도 그렇다. 잔은 바닥부터 완전히 바뀌었는데, 넘어지던 시절의 이름만 그대로 얹혀 지금까지 왔다. 다음에 위스키 록스 잔을 손에 쥘 때, 그 묵직한 바닥이 원래는 없던 것이라는 걸 떠올려 봐도 좋겠다.
온더록 텀블러 — Benjamin Thompson / Wikimedia Commons (CC BY 3.0) · 바닥이 뾰족한 옛 잔(슈투르츠베허) — Bullenwächter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 컷글라스 올드패션드 잔 — Andreas Argirakis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